SPECIAL
공구인 만인보 ③ 대승철물상회 이영춘 여사
대승철물상회 이영춘 여사는 홍성전통시장의 ‘맏언니’라 불린다. 아버지 좌판에서 열두 살 무렵부터 함께 물건을 팔며 70년 넘는 세월동안 철물장사를 해 온 이영춘 여사.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그녀의 인생과 장사 이야기.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
충청남도 홍성군은 예로부터 ‘천고낙지(天鼓落地), 하늘에서 북이 떨어진 천혜의 명당’이라 불린 지역으로, 그만큼이나 북을 울릴 정도의 큰 사건과 뛰어난 이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일제 침탈에 맞선 의병 투쟁의 중심지였고 ‘님의 침묵’을 쓴 시인이자 독립유공자인 한용운 선생, 일제에 저항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 등 여러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난 곳이 홍성군이다.
이 곳 홍성군의 옛 읍내장이었던 대교리 홍성전통시장에는 70여 년 동안 철물점을 운영해 온 터줏대감이 있다. 대승철물상회 이영춘 여사가 그이. 대승철물상회는 여사의 부친 고(故) 이학선 대표가 1943년 무렵 홍성장에 처음 문을 연 철물점으로, 원래는 전당포를 하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다 빼앗기고 이후 철공소와 자전거포를 거쳐 좌판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진 철물점이 대승철물상회다. 부친의 좌판을 물려받아 현재 홍성전통시장의 ‘맏언니’로 북을 둥둥 울리는 이가 바로 이영춘 여사다.
올해 나이 여든여덟. 이영춘 여사는 한 세기 가까운 삶의 여정이 여느 여성과는 다르다. 홍성초등학교(당시 홍성국민학교)를 졸업한 12살 무렵,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철물좌판에서 함께 장사를 나섰다. 그렇다고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을 상대하는 장사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학교에 가라 해도 한 달에 열 번은 더 빠지며 아버지의 좌판에 나섰다. 부모님이 크게 말렸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참 재미있게 살던 시절이었다며 그녀는 회고한다.
당시 여사는 홍성 근처 지역에 장이 서는 날이면 장시를 돌아다니며 낫이나 호미 등을 판매했다. 친정오빠가 모는 트럭에 올라타 해미장이며 갈산장이며 충청도 곳곳의 장터에 가 밀짚으로 만든 밀대방석을 깔고 좌판을 펼쳤다. 그렇게 다닌 여사의 철물장사는 시간이 흐르며 장터마다 소문이 퍼져 ‘낫 장수 처녀’, ‘호미 파는 색시’등의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화제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학생 시절 애순이처럼 당차고 다부졌던, ‘기세 넘치는 장사꾼’이 어린 시절의 이영춘 여사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장사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원했던 장사여서 그랬는지 장사 수완도 남달랐다. 게다가 ‘어린 색시를 어떻게 한 번 꼬셔볼까’ 하는 남정네들의 엉큼한 생각에 이영춘 여사의 좌판 앞에는 물건을 사려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젊은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고객들도 여럿. 하지만 여사는 오로지 장사밖에 몰랐다.
장사가 잘 되는 날에는 낫을 하루에 300~400개씩 팔았다. 당시에는 완성품이 아닌 날과 자루를 따로 팔았기 때문에 구입한 낫의 날을 자루에 박아주느라 여사의 손에는 굳은살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래도 장사가 잘 돼 신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충청도 곳곳의 장터에서 각종 철물을 팔며 어엿한 장사꾼으로 성장한 그녀. 오로지 장사만 알고 살던 그녀에게도 시나브로 인생의 봄날은 찾아왔다. 인연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녀의 좌판 바로 앞에서 가마솥을 판매하던 청년 박생기 씨가 그 인연이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이 고향인 남편의 본가 역시 철물점을 운영하는 집이었다 하니 어찌 보면 인연은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장터에서 정분이 난 충청도 낫 장수 처녀와 경상도 가마솥 총각은 장터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쇠’처럼 사랑을 꽃피웠다. 이영춘 여사에게 남편과 결혼한 이유를 묻자 곧장 ‘잘생기고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는 대답이 나왔다. 남편 박생기 씨는 인물만 훤칠했던 것이 아니라 속정 깊은 남자였다.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이가 남편과 같았을까? 대개 무뚝뚝하다는 경상도 남자같지 않게 아내를 챙겨주고 사랑할 줄 알던 남편과 그녀의 애틋한 금슬은 만년까지 이어졌다.
훤칠한 남편을 시장의 다른 색시들이 채갈까 얼른 결혼했다는 그녀.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철물좌판을 열심히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70~8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시기, 당시는 그럴 때였다. 갈퀴로 긁어모으는 것처럼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홍성전통시장 내 작은 점포를 구입했고 또 돈을 벌어 옆 점포를 구입하고 맞은편 점포를 구입하고 바로 옆에 있던 주점 점포도 구입했다. 그렇게 다섯 개 점포를 구입한 자리가 지금의 대승철물상회 자리다. 오직 철물장사 한 길을 파고들어 성공을 거둔 셈이다.
번 돈을 은행에 저금하는 것도 하는 거지만 그래도 많은 돈이 불안해 땅에 묻어 놓았을 정도였다고 여사는 당시의 벌이를 말한다.
번 돈으로 큰아들에게는 예식장 건물을 지어줬다. 하루에도 예식장에서 여덟아홉 명씩 결혼하던 시절이었다. 철물점 직원도 셋 넷을 뒀다. 80~90년대쯤이었을까? 이영춘 여사와 남편의 대승철물상회는 부를 안정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역봉사도 행했다. 남편 박생기 씨는 홍성 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해 1995년에는 회장을 역임하기까지 했다. 고향도 아닌 먼 타지에서 라이온스클럽 회장까지 맡으며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영춘 여사의 내조가 바탕이 되었다. 타계하기 1년 전 있었던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故박생기 씨는 “내가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모두가 아내 덕분”이라고 말하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돈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환한 봄날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는 것일까? 하루는 남편과 제주도 관광을 다녀왔더니 직원들이 돈을 다 훔쳐서 도망가 버렸다. 결국 잡았지만 젊고 어린 직원들이라서 돈을 물어내라 하지 않고 용서해 줬다. 또 어떻게 돈 냄새를 맡고 온 것인지 사기꾼들이 하나 둘씩 대승철물상회를 찾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드라마 속의 애순·관식 부부가 당한 것처럼 ‘떳다방’ 사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착한 마음으로 살며 오로지 장사밖에 모르던 이영춘 여사 부부는 적지 않은 돈을 사기당하고 말았다. 재판을 했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 돈보다 엄마아빠 건강이 더 중요하지 않냐고 말하던 큰아들의 말에 재판을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남편은 오래 이어진 재판의 피로감 탓에 결국 여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2009년의 일이다.
여사의 부친이 홍성전통시장 모퉁이에서 노점으로 시작해 80년 가까운 오랜 시간동안 운영되어 온 대승철물상회. 이름만 그저 ‘상회’일 뿐이지 그 규모로 보면 실로 ‘철물백화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골목의 다섯 개 매장이 모두 대승철물상회. 오랜 시간 동안 각종 철물들을 전부 취급하다 보니 농가에서 필요로 하는 농공구나 농자재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전부 다 찾을 수 있다. 덕분에 단골손님 또한 적지 않다. 가게 주변 시장에는 몇 곳의 철물점이 더 있지만 유독 대승철물상회를 찾는 이들이 많다. 다들 철물점이 아닌 여사를 찾는 것이다.
현재 대승철물상회는 여사의 둘째아들 박성전 씨가 물려받아 3대째 가업을 이어고 있다. 가게에는 소중한 가보(家寶)가 하나 있다. 여사의 부친이 물려줬다는 목제 ‘돈통(돈괘)’이 그것이다.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나뭇결이 곱게 살아있는 돈통은 지금도 새것처럼 튼튼하기만 하다. 마치 나이 팔순을 한참 넘겼지만 70년 전 ‘낫 파는 처녀’의 생생한 기운이 여전한 이영춘 여사를 보는 듯하다. 그 돈통은 홍성장터보물로 지정되어 지금도 홍성시장을 찾는 이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가게를 아들에게 물려줬지만 여사는 오늘도 가게에 나와 판매를 돕는다. 농약사로 바꾼 옆 매장은 둘째며느리가 나와 장사 중이다. 물건을 사든, 사지 않든 가게를 찾는 단골손님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웃음 짓는, 시장 상인중에서 가장 나이 많다는 이영춘 여사. 시장사람들은 그녀를 ‘홍성전통시장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시장의 맏언니’라 부른다.
여사님, 70년 간 철물점에서 폭싹 속았수다!
글·사진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