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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거리 둘레길 ③ 부산 공구상의 발원지 - 국제시장
공구거리 둘레길 - ③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물건과 귀국 동포들의 물건이 거래되던 장터로부터 비롯한 국제시장. 경제 호황기엔 80여 곳의 공구상이 활발히 영업하던 국제시장은 부산 공구상의 발원지라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국제시장의 기원은 광복 후 부산 신창동에 조성되었던 장터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던 수만 명의 일본인들은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함으로써 귀국을 선택했다. 짐을 잔뜩 짊어진 채 부산항으로 밀려들었지만 패전국 국민으로서 그 많은 짐들을 전부 배애 싣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짐을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헐값에 넘기기도 하며 귀국 여비를 마련했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손을 떠난 물건들은 부산시 중구 신창동(현재 국제시장 인근) 공터에 쌓였고 그렇게 쌓인 물건들은 곧바로 또 거래되곤 했다.
일본인들의 귀국과 맞물려 해외 동포들의 귀환도 이루어졌다. 귀국 동포들은 일본인들이 떠난 부산 중구와 동구 등에 판잣집을 짓고 거주를 시작했는데 부산시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부산에 지어진 판잣집이 2만 동(棟)에 이르렀다고 한다. 돌아온 동포들 가운데 부산에 머무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은 이들 역시 여비 마련을 위해 해외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공터로 가져와 팔았다.
수많은 물건들과 사람들이 모여 거래가 이루어지던 신창동 공터는 자연스럽게 시장의 모습을 띠게 되었고 당시 이곳은 ‘도떼기시장’이라 불렸다. ‘도떼기’라는 단어는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물건을 헐값에 거래할 때 사용했던, ‘잔돈 없이 판다’는 뜻의 일본어인 ‘도따(どた)’ 에서 왔다는 설, ‘나눠 팔지 않고 한꺼번에 판다’는 우리말 표현인 ‘도거리’에서 왔다는 설 등이 있다. 그만큼이나 시끌벅적하던 시장이었다.
광복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의 공세에 쫓긴 피난민들은 서울을 대신해 임시 수도가 되었던 부산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40만여 명 정도였던 부산의 인구는 밀려드는 피난민들에 의해 1950년에는 88만여 명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하였을 정도였다. 많은 피난민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점을 차렸고, 1000여 명 정도였던 노점상들은 1.4후퇴 즈음해서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불어났다. 수많은 인파로 물결을 이루었던 국제시장에는 유난히 큰 화재가 많았다. 다섯 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를 겪은 국제시장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새롭게 거듭났다. 그런 과정 속에서 국제시장은 1960년대 말 큰 번영을 이루었다. 당시 미국의 군수물자부터 한국전쟁 이후 외국에서 보내 온 구호물자 중 뒤로 나와 거래되던 각종 물건들, 그리고 홍콩, 마카오, 일본 등지에서 몰래 반입된 밀수품 등 온갖 것들이 국제시장으로 들어와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특히나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와 판매되던 공구는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며 거래되었다. 이때부터 국제시장에 공구상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한동안은 국제시장을 통하지 않으면 산업공구를 구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을 만큼, 국제시장은 우리나라 공구 유통의 메카로 탈바꿈하였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기계공구류를 팔아 돈을 마련한 공구 노점상들은 국제시장 내에 점포를 내면서 공구상권이 형성되었다. 당시 국제시장의 공구철물점은 80여 곳에 이를 정도였다. 우리나라 경제 호황기였던 70~80년대, 국제시장 역시 그 흐름을 함께했다. 당시 부산에 있던 수많은 해운·선박업체와 그 업체들의 하청업체, 그리고 각종 공업사들은 배와 배에 들어갈 부품들을 만들고 수리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공구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공구들은 전부 국제시장 공구상가로부터 유입되었다. 절삭공구, 측정공구, 각종 수공구며 용접공구까지 국제시장의 공구상들은 물건을 판매하는 데 쉴 틈이 없었다. 3~4평 남짓 좁은 매장이었지만 인근에 창고를 대여섯 개씩 두고 전화로 주문을 받으면 오토바이로 하루에도 수차례씩 물건을 배달해주곤 했다.
부산지역 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전역으로부터 물건을 가지러 오는 공구철물점도 끊이질 않았다. 창원, 마산, 김해, 양산 등 각 지역에서 공구를 중도매로 떼어가기 위해 국제시장을 찾았다. 많은 업체들이 몰려 있었음에도 국제시장에 입점하기 위해 권리금을 부담하며 웃돈까지 주고 들어오려는 공구상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국제시장으로부터의 공구 판매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도 이루어졌다. 80~90년대 아직 서구에 개방이 원활하지 않았던 러시아는 가까운 한국에서 공구류를 수입했다. 부산항으로 들어온 러시아의 외항선은 컨테이너 가득 식품·의류와 함께 각종 전동공구류와 용접공구들을 구입해 채워 돌아가곤 했다. 급속도로 발전해 가던 우리나라 경제와 함께 국제시장 매출 역시 호황을 이루었다. 당시는 그야말로 국제시장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찾아온 IMF는 한껏 끓어오르던 우리나라와 국제시장의 분위기를 차게 식혀 버렸다. 부산항 인근과 부산 영도에 자리 잡고 있던 많은 선박업체들이 문을 닫았다. 대기업이 문을 닫으니 그 아래 하청업체들은 줄줄이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업체들에 납품하던 공구상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의 본격적인 경제 개방으로 많은 공구브랜드들이 진출하며 공구 수출 역시도 종료되고 말았다. 국제시장의 많은 공구상은 문을 닫거나 또는 부산 사상구에 새로이 조성된 사상유통상가(부산산업용품유통단지) 쪽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2019년 세계에 퍼진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덮치며 현재 국제시장에는 15곳 남짓한 공구상만이 남아 있다.
국제시장 역사
•1945 광복 후, 일본인의 전시물자와 귀국 동포들이 가져온 물건들이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빈터에 상설시장이 들어섬. ‘도떼기사장’이라 불림.
•1948년, 판자로 된 건물 12개 동을 짓고 ‘자유시장’이라 명칭하게 됨.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며 진주한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용물자와 일본산, 국내산 물건이 한데 모여 거래되며 ‘국제시장’이라 불리게 됨.
•1953년 1월, 대화재가 일어나 1,230동의 건물 소실, 재산 피해 14억3000만 원.
•1960년대, 1공구부터 6공구까지 개별 조합별로 장사 시작.
•1968년 1월, 목조 2층이던 시장에 또다시 큰 불이 나 지금의 철근 콘트리트 건물로 개축.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으로 법인 등록.
•2014년, 동명의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에 힘입어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남.
•2017년, 국제시장 6공구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복합문화공간 오픈.
•2018년, 6공구에 이어 1공구 또한 글로벌 복합문화공간 오픈.
경제 활황기와 비교하면 업체의 수나 그 매출액이 현저히 감소한 지금, 국제시장 공구상들은 현재 국제시장의 주차장을 큰 문제로 꼽는다. 중도매 매출이 중심이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소매에 집중할 수밖에는 없는데, 계획된 공구단지가 아니라 구도심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인 국제시장 공구단지는 고객의 차량이 주차가 힘들다. 또한 매장들도 도로와 인접한 바깥쪽이 아닌 시장의 내부에 위치해 있어 물건을 옮기기도 쉽지 않다. 그와 함께 오른 임대료 부담도 입주해 있는 공구상들에게는 부담이다. 2014년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은 외지인들에게 국제시장이란 장소를 알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공구상에게는 하등 이익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상승한 유명세에 가게 월세만 올랐을 뿐이다. 오른 임대료와 연이은 불경기, 그리고 코로나19의 여파로 국제시장에는 곳곳에 임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전국 공구상에 2세들의 운영이 활발해진 요즘, 그러나 국제시장 공구상에서는 젊은 얼굴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곳에서 미래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지역 공구상의 발원지였던 국제시장 공구상은 어쩌면 새로운 흐름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80년대 초에 국제시장에 들어왔으니까 장사한지 한 40년 됐죠. 여기 뒤쪽 골목에서 보쉬 대리점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경기가 상당히 좋았어. 중도매로 각 상점, 철물점들에 팔았던 거죠. 창원 마산 김해 양산 이런 쪽 철물점에서 다 국제시장으로 와서 공구를 사 갔어요. 그리고 이쪽 부산항이며 영도 쪽 선박회사들. 배를 만들기 위해서 안에 들어갈 부품 제작하는 공업사들. 그쪽으로 진짜 물건들 많이 납품했죠. 당시엔 여기 국제시장에 공구상이 80곳도 넘었을 거예요.
그때 한달 매출액이 7~8천만 원 정도. 좋을 때는 한 달 1억까지도 팔았었어요. 이 좁은 매장 3~4평 되는 매장에서 그렇게 팔았던 거예요. 변두리에 창고 여러 개 두고요. 그 당시에는 물량이 무척 귀했거든요. 물량이 적다 보니까 무슨 물건이든 프로모션 하면 잔뜩 받아놨다가 묵혀서 팔면 돈이 됐거든. 그때 하루에 오토바이로 10번도 더 싣고 배달해주고 그랬어요. 직원도 한 서너 명 두고. 그때 같은 시절이 한 번 더 오면 좋겠죠.
그러다 IMF오고 불황이 계속되다 보니까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어요. 업체들도 많이 줄어들고요. 90년대 초에 저쪽 사상구에 사상유통상가 생기는 바람에 그쪽으로 여러 업체들이 옮겨 갔고. 그리고 주차난도 있고 지금은 거기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많이 죽었죠. 다녀 보면 목 좋은 곳에도 임대 다 붙여놨어. 붙여놓은 지가 3년도 넘었는데 아직까지도 빈 매장이에요.
그리고 <국제시장> 영화 개봉한 다음에는 꽃분이네 보러 온다고 외지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가는데 덕분에 가게세만 세 번 올랐어요. 그러다가 코로나 오니까 집세를 또 낮춰주긴 하더라고. 코로나 때 매장들이 문을 많이 닫았는데 코로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 전부터 곪아있던 게 터진 거예요.
근처에 타워주차장이 몇 군데 생겼는데도 다른 곳에 비하면 공구나 철물 이런 걸 사러 오는 차가 거의 없어요. 주차가 불편하니까. 또 주차하려면 주차비 내야지 그러니까 여기로 공구 사러 오는 건 시간낭비지. 요즘은 인터넷에서도 많이 구입하고 변두리 가까운 공구상, 이런데 차 가지고 가서 편하게 사는 거지. 조금 비싸더라도 그게 수월하니까.
내 생각에는 한 번 정리가 되지 않으면 국제시장에 공구상 다 사라질 것 같아요. 공구상이 장사를 좀 하려면 창고도 필요하고 최소 50평 100평은 돼야 하는데 국제시장에는 그럴 땅이 없어요. 매장이 작다 보니까 매출도 안 나고, 그러다 보니 2세들이 이어받을 수가 없죠.
예전 좋았던 시기가 한 번 더 오면 좋겠지만 아마 앞으로는 기대하기 힘들 거예요.
헌 책과 새 책이 어우러진 곳
보수동 책방골목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조성된 곳이다. 이북에서 피난 온 어느 부부가 박스를 깔고 각종 잡지와 헌책 등으로 노점을 열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입구부터 예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책방골목을 방문해 보자. 따듯한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주소 부산 중구 책방골목길 16
과거세대와 미래세대가 공존
부평 깡통시장
골목 입구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부평 깡통시장. 국제시장과 맞붙어 있는 부평 깡통시장의 차이점은 국제시장은 ‘만물시장’의 느낌이고 깡통시장은 ‘음식시장’느낌이라는 점이다. 배가 고프다면 깡통시장으로 달려가 한 끼 식사를 해결하자.
주소 부산 중구 부평동2가 82
영업시간 매일 8:30~20:00
부산국제영화제의 중심
BIFF광장
부산 관광지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인 BIFF광장(비프광장).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부산극장을 비롯해 각종 영화계 인사들의 핸드 프린팅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씨앗호떡과 떡볶이 매대들도 기다리고 있으니 꼭 한번 방문해 보자.
주소 부산 중구 남포동3가 15-1
냉채족발이 시작된 곳
부평 족발골목
국제시장을 구경하다 광복로를 따라 내려가면 부평동 자락에 모여 있는 족발집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의 시그니쳐 메뉴는 바로 냉채족발. 톡 쏘는 신맛과 감칠맛이 나는 족발이 궁금하다면 부평동 족발골목을 방문해 보자.
주소 부산 중구 부평2길 3
글·사진 _ 이대훈 / 자료참고 _ 부산근대역사관, 국제시장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