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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가업을 잇는 사람들

 

은행 청원경찰 출신 아들의 공구상 승계 첫 걸음

 

충남 천안 삼연철물종합건재 이용태, 이강연 부자

 

자녀가 공구상을 물려받겠다 하는 건 복이라 한다. 부모 걱정에 좋은 직업 그만두고 공구상으로 온 아들을 둔 삼연철물종합건재 이용태 대표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나이든 부모 걱정에 가업승계 마음먹어


천안시 삼연철물종합건재의 아들, 올해 나이 스물일곱의 이강연 씨는 대학교 경호학과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원체 활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태권도 실력도 수준급이며 대학 학과도 자신의 취미와 특기에 맞춰 위에서 말한 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시중 은행의 청원 경찰 생활과 현금수송원 일을 2년여 하다가 돌연 그만 두고 아버지 이용태 대표가 운영하는 공구상으로 진로를 틀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부모님 걱정 때문이다.
“청원 경찰 일도 할 만한 일이죠. 제 전공과 흥미에도 딱 맞는 일이었고요. 그렇게 일은 재미있었는데 보니까 직원도 없이 부모님 두 분이서 공구상을 운영한다는 게 걱정되더라고요. 휴일도 없이 하루 종일 쇠로 된 공구 만지는 일이 힘들잖아요. 더군다나 부모님이 연세도 있으신데 나이든 분들이 하기에는 더더욱 그렇고요.”
그렇게 이강연 씨는 부모의 요청보다 자신이 먼저 공구상에서 일하겠다 말했다. 아버지 이용태 대표도 내심 아들 이강연 씨가 공구상에 와서 함께 일해주기를 바라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좀 더 미래의 일. 아들이 사회생활, 직장 생활을 어느 정도 하고 나서 나이 서른은 넘긴 후에 자신이 운영하는 삼연철물로 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 생각처럼 자신과 아내 둘이서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우리 가게에도 직원이 있었죠. 직원을 두 명 두고 있었는데 불황이 계속되고 또 인건비 상승에 감당을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직원들이 떠나가고 집사람하고 둘이 하던 차에 아들놈아가 같이 일 좀 하면 안되겠냐고 했던 거죠. 네 맘대로 해라 했더니 선뜻 오더라고요.”

 

 

아들이 공구상 물려받겠다 하는 것은 복(福)


아들 이강연 씨가 아버지의 공구상으로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의 일이다. 이제 1년 남짓 일을 배우고 진학했다. 1년여의 시간동안 공구 일을 얼마나 익혔느냐 묻는 질문에 웃으며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라고, 아직 한참 멀었다고만 말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런 아들이 이용태 대표는 참 듬직하단다.
“듬직하죠. 믿음직스럽고. 아무래도 가족이니까 그런가 봐요. 직원이 있을 때는 못 그랬는데 요즘은 아들이 있으니까 제가 바깥에 나가서 다른 영업 활동도 할 수 있고. 그런 장점도 있어요. 그리고 주위 공구상이나 철물점을 둘러보면 요즘은 자녀들이 와서 도와주는 집이 많아요. 그런데 개중에는 아들에게 일 좀 도와 달라 했는데 거절하고 안 오는 아들들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아들이 선뜻 공구상을 물려받겠다고 말하는 것도 참 복인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아버지의 공구상이 참 재미있었다는 아들 이강연 씨. 가게 안을 빼곡이 채우고 있던 각양각색 수많은 공구들이 마치 장난감 같아 신기하게만 보였다는 그다. 하지만 공구상에 들어와 일을 하다 보니 장난감은 무슨 소리요, 밀려오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공구상에서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보기만 하던 것과 직접 몸으로 하는 것이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힘들어요. 이게 또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다 보니까 더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젊은 저도 이렇게 힘든데 부모님은 얼마나 더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에게는 듬직할지 몰라도 아들에게는 힘든 공구상 가업 승계의 첫 걸음이다.

 

 

직원 아닌 아들을 가르치는 방법


공구상에 익숙할지는 몰라도 공구상 일에는 말 그대로 ‘초짜’인 아들에게 일을 가르치기 위해 대표는 맨 처음 아들과 함께 현장을 다녔다. 납품 방법과 영업 방법을 가르치며 현장 사람들에게 아들의 얼굴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매장 내 물건 위치와 사용 방법을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익히기를 요구했다. 공구상이라는 공간을 단지 일하다 퇴근 시간이면 떠날 공간이 아니라 온 인생을 걸 공간으로 여겨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가업을 잇는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어요? 일반 직원과는 전혀 다르죠. 아들이니까. 저도 아들에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제가 알고 있는 노하우나 공구에 대한 지식 같은 걸 전부 다 전해 주려 하고 있어요. 아직 아들이 공구상에 온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좀 더 지나면 다 파악하지 않을까요.”
지금 아버지란 어떤 존재냐고 묻자 아들은 ‘직장 상사’라고 대답한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상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을 배우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삼연철물건재는 아들이라고 편하기만 한 공구상이 아니라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직장’이다.

아들 이강연 씨에게는 아직 명함이 없다. 명함 뿐 아니라 공구상에서의 직함도 없다. 자기 스스로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공구상 일에 익숙해지고 뭔가 성과를 낸 후, 그 때 직책을 받고 제대로 된 명함을 파겠다 말하는 그였다. 

글 · 사진 _ 이대훈

 


 

가족 모두가 하는 가업 계속 이어가야죠

 

신생볼트공구사 문제훈, 문경일 부자

 

자녀가 공구상을 물려받겠다 하는 건 복이라 한다. 부모 걱정에 좋은 직업 그만두고 공구상으로 온 아들을 둔 삼연철물종합건재 이용태 대표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나이든 부모 걱정에 가업승계 마음먹어


천안시 삼연철물종합건재의 아들, 올해 나이 스물일곱의 이강연 씨는 대학교 경호학과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원체 활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태권도 실력도 수준급이며 대학 학과도 자신의 취미와 특기에 맞춰 위에서 말한 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시중 은행의 청원 경찰 생활과 현금수송원 일을 2년여 하다가 돌연 그만 두고 아버지 이용태 대표가 운영하는 공구상으로 진로를 틀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부모님 걱정 때문이다.
“청원 경찰 일도 할 만한 일이죠. 제 전공과 흥미에도 딱 맞는 일이었고요. 그렇게 일은 재미있었는데 보니까 직원도 없이 부모님 두 분이서 공구상을 운영한다는 게 걱정되더라고요. 휴일도 없이 하루 종일 쇠로 된 공구 만지는 일이 힘들잖아요. 더군다나 부모님이 연세도 있으신데 나이든 분들이 하기에는 더더욱 그렇고요.”
그렇게 이강연 씨는 부모의 요청보다 자신이 먼저 공구상에서 일하겠다 말했다. 아버지 이용태 대표도 내심 아들 이강연 씨가 공구상에 와서 함께 일해주기를 바라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좀 더 미래의 일. 아들이 사회생활, 직장 생활을 어느 정도 하고 나서 나이 서른은 넘긴 후에 자신이 운영하는 삼연철물로 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 생각처럼 자신과 아내 둘이서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우리 가게에도 직원이 있었죠. 직원을 두 명 두고 있었는데 불황이 계속되고 또 인건비 상승에 감당을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직원들이 떠나가고 집사람하고 둘이 하던 차에 아들놈아가 같이 일 좀 하면 안되겠냐고 했던 거죠. 네 맘대로 해라 했더니 선뜻 오더라고요.”

 

 

아들이 공구상 물려받겠다 하는 것은 복(福)


아들 이강연 씨가 아버지의 공구상으로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의 일이다. 이제 1년 남짓 일을 배우고 진학했다. 1년여의 시간동안 공구 일을 얼마나 익혔느냐 묻는 질문에 웃으며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라고, 아직 한참 멀었다고만 말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런 아들이 이용태 대표는 참 듬직하단다.
“듬직하죠. 믿음직스럽고. 아무래도 가족이니까 그런가 봐요. 직원이 있을 때는 못 그랬는데 요즘은 아들이 있으니까 제가 바깥에 나가서 다른 영업 활동도 할 수 있고. 그런 장점도 있어요. 그리고 주위 공구상이나 철물점을 둘러보면 요즘은 자녀들이 와서 도와주는 집이 많아요. 그런데 개중에는 아들에게 일 좀 도와 달라 했는데 거절하고 안 오는 아들들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아들이 선뜻 공구상을 물려받겠다고 말하는 것도 참 복인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아버지의 공구상이 참 재미있었다는 아들 이강연 씨. 가게 안을 빼곡이 채우고 있던 각양각색 수많은 공구들이 마치 장난감 같아 신기하게만 보였다는 그다. 하지만 공구상에 들어와 일을 하다 보니 장난감은 무슨 소리요, 밀려오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공구상에서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보기만 하던 것과 직접 몸으로 하는 것이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힘들어요. 이게 또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다 보니까 더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젊은 저도 이렇게 힘든데 부모님은 얼마나 더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에게는 듬직할지 몰라도 아들에게는 힘든 공구상 가업 승계의 첫 걸음이다.

 

 

직원 아닌 아들을 가르치는 방법


공구상에 익숙할지는 몰라도 공구상 일에는 말 그대로 ‘초짜’인 아들에게 일을 가르치기 위해 대표는 맨 처음 아들과 함께 현장을 다녔다. 납품 방법과 영업 방법을 가르치며 현장 사람들에게 아들의 얼굴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매장 내 물건 위치와 사용 방법을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익히기를 요구했다. 공구상이라는 공간을 단지 일하다 퇴근 시간이면 떠날 공간이 아니라 온 인생을 걸 공간으로 여겨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가업을 잇는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어요? 일반 직원과는 전혀 다르죠. 아들이니까. 저도 아들에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제가 알고 있는 노하우나 공구에 대한 지식 같은 걸 전부 다 전해 주려 하고 있어요. 아직 아들이 공구상에 온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좀 더 지나면 다 파악하지 않을까요.”
지금 아버지란 어떤 존재냐고 묻자 아들은 ‘직장 상사’라고 대답한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상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을 배우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삼연철물건재는 아들이라고 편하기만 한 공구상이 아니라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직장’이다.

아들 이강연 씨에게는 아직 명함이 없다. 명함 뿐 아니라 공구상에서의 직함도 없다. 자기 스스로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공구상 일에 익숙해지고 뭔가 성과를 낸 후, 그 때 직책을 받고 제대로 된 명함을 파겠다 말하는 그였다. 

글 · 사진 _ 한상훈

 


 

대를 이은 장인정신 45년 역사의 자전거숍

 

울산 삼화MTB 정창석, 정호찬 부자

 

자신이 일으킨 가업을 아들에게 물려줬다고 해서 가업 승계가 끝이 난 건 아니다. 물려받은 2세가 가업을 더욱 탄탄하게 다질 수 있어야만 성공적인 가업 승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화MTB 정호찬 대표는 아버지의 자전거숍을 더욱 더 확장하고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울산 자전거숍 하면 바로 이 곳!

물론 다른 해라고 안 그렇겠냐마는 1974년은 특히 기록이 필요한 해다. 세계적으로는 ’74 서독월드컵이 개최돼 기존의 쥘 리메컵 대신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월드컵’이 최초로 사용되었던 해이며 국내적으로는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청량리역 구간을 비롯한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처음으로 개통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금 더 좁혀 지역적으로 보자면 울산광역시 남구 야음동에 현재의 삼화MTB, 삼화자전거가 처음으로 문을 연 것이 바로 1974년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삼화자전거를 오픈한 정창석 씨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시기는 집집마다 자전거 한 대씩은 보유하고 있던 때였죠. 그런데 아직 자전거 숍, 자전거 수리점이라는 개념은 잡혀 있지 않은 때였어요. 자전거 가게 이름은 붙어 있어도 자전거뿐만 아니라 리어카도 용접하고 약간 고물상 개념도 함께 하던 곳이 당시의 자전거 가게였죠.”
그 시기만 해도 자전거숍의 업종 등록 자체가 고물상에 포함되었던 때다. 삼화자전거도 다르지 않았다. 기름때 꼬질꼬질한 고물들이 가게 안에 수북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 삼화MTB를 방문해 보면 밝은 조명과 깨끗하고 정갈한 매장 인테리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창석 씨의 아들, 현재 삼화MTB의 대표인 정호찬 대표가 직접 꾸민 인테리어다. 지금 삼화MTB가 울산은 물론 국내를 대표하는 자전거숍으로 우뚝 선 이유는 다만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과 깔끔한 인테리어뿐일까? 그럴 리가. 기술이 없다면 그런 이름은 허황된 것일 뿐이다.

 

 

미국 유명 자전거 학교 졸업한 아들 정호찬 대표


삼화MTB의 탄탄한 기반을 아버지 정창석 씨가 다졌다면 그 기반 위에 반석을 올리고 기둥을 세워 지금의 이름을 빛나게 한 것은 아들 정호찬 대표의 노력 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호찬 대표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전거 학교인 BBI(Barnett Bicycle Institute)에서 자전거 프로 정비사 과정을 졸업했다. 정 대표가 유학까지 결심하게 된 이유는 우리나라 자전거 정비 기술의 한계에서 느낀 답답함 때문이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검색만 해 봐도 다양한 자전거 정비 기술 동영상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배우던 당시에는 독학하는데 한계가 있었어요. 조금 더 정밀한 정비, 조금 더 전문적인 정비가 필요한데 어떤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유학을 결심했던 거예요.”
그렇게 떠난 미국에서 학교에 들어가 교육받았던 내용을 정 대표는 한 문장으로 대답했다. “완전히 뒤엎었어요.” 라고.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결과만 맞으면 넘어갔던 것을 미국에서는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많은 과정들까지 중요하다 교육받았다. 그리고 그 교육을 통해 그는 답답하다고만 느꼈던 한계를 넘어선 후, 2002년 대표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로 돌아와 가업 승계를 시작했다. 가게의 낡은 인테리어를 확 바꾼 것도 미국에서 받은 교육 결과의 일환이라면 일환이다.

 

 

가업을 잇는다는 것의 의미


현재 삼화MTB에는 아들과 아버지, 정호찬 정창석 대표가 둘 다 나와 함께 일한다. 하지만 둘의 업무는 구분되어 있다. 아버지는 생활자전거의 수리와 납품, 그리고 아들은 산악자전거나 전문 자전거의 수리와 매장의 전반적인 업무들. 가게의 운영은 아들 정호찬 대표에게 다 넘긴 상황이지만 아들 혼자 다 하기는 어려울 매장 일을 아버지가 도와주는 개념이라고 한다. 대표에게 아버지는 ‘스승이자 동반자’라 불리는 이유가 와닿는 순간이다. 아버지 정호찬 씨는 아들과 일을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지난 45년의 경험에서 나온 지침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역할도 수행 중이다.
“항상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손을 조심해야 한다’라는 말이에요. 자전거숍 일은 그냥 쉽게 하는 일이 아니라 손을 세밀하게 놀려야 하는 정밀 기술직이거든요. 아버지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해왔다는 건 뭔가 나름의 목표가 있기 때문 아닐까요. 사실 저도 기술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어요. 단순히 수리하고 팔아서 수익만을 창출할 목적으로 하는 건 결코 아니고요. 또 일 자체도 저에게는 참 재밌거든요. 계속 해도 쉽게 질리는 일이 아니에요.”

 

 

전국에서 찾는 손님들


지금 삼화MTB에는 울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손님들이 찾아온다. 수리 솜씨를 믿기 때문이다. 찾아올 뿐만 아니라 택배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수리 요청 물건이 들어온다. 이렇게 유명해진 것은 대표의 뛰어난 기술 덕도 있지만 그 기술이 널리 알려진 덕이 더 크다. 현재 대표의 블로그 하루 방문자 수는 400~500명. 지금은 일이 바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그 정도지 한때는 평균 방문자 수 1500명 정도였다 한다. 게다가 한 자전거 전문 잡지에 수년간 수리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고 출간한 책도 여러 권이다. 이처럼 정호찬 대표는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확장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듬직하다는 눈빛이 공감 간다.

글 · 사진 _ 이대훈

 


 

3대 이어가는 비결은 실력

 

㈜금성다이아몬드 강길박 회장, 강재호 대표이사

 

대한민국에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유리절단기, 흡착기 제작 기업이 있다. ㈜금성다이아몬드는 3대가 함께 이어 내려가며 유리와 관련되는 공구 및 각종 유리관련 장비를 제작해 왔다.

 

 

 

 

국내 최초 유리 절단기 제작업체 


유리는 건축, 전자제품 등 많은 곳에 쓰이는 산업용 제품이다. 전 세계로 수출하는 한국산 TV, 스마트폰에도 유리가 필수적인 재료다. 이런 유리를 잘 다루는 것도 큰 기술이다. 유리를 가공하는 것에는 각종 도구와 기술이 필요하다. 금성다이아몬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용 다이아몬드 공구 및 유리관련 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강길박 회장으로부터 창업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저희 아버지이신 고(故) 강갑길 회장님은 일본에서 산업용 다이아몬드 공구제조 기술을 배우신 분이셨습니다. 처음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했었고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집안이 무척 어려웠어요. 저는 월남전을 참전했다가 돌아온 이후 아버지를 설득해 가내 수공업 형태의 유리공구가공업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때가 1968년입니다.”
아직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 젊은 패기와 부친이 가진 기술력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한 것이 금성다이아몬드였다. 지금이야 금성다이아몬드의 유리칼은 누구나 알아주지만 설립 초창기에는 그렇지 못했다. 판로를 개척하고 지금의 기술력을 인정받도록 노력한 것은 강길박 회장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제품 홍보를 위해 당시 가장 큰 유리 유통업체에 추석선물용 유리칼 판촉물 아이디어로 금성다이아몬드의 유리칼을 알렸고, 국내에서는 듣도 보지도 못한 유리흡착기라는 제품을 처음으로 개발하여 국산화했다. 그렇게 금성다이아몬드를 30년 동안 꾸준히 성장시키자 1998년에는 직원 수가 40명에 가까워질 정도로 성장시켰다.   

 

 

좋은 인재로 성장한 아들 강재호 대표


어느 기업이나 우수한 인재를 뽑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찾기 어렵다. 특히 중소기업은 더더욱 인력난을 겪는다. 반면에 고학력의 우수한 인재들은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좋은 직장을 만나기 어렵다. 강길박 회장의 아들이자 현재 금성다이아몬드를 이끄는 강재호 대표도 다른 회사 취업이 쉽지 않아 취업준비생 생활을 오래 했다. 그에게 금성다이아몬드에 입사한 계기를 물어보았다.
“올해는 아버님께서 금성다이몬드를 창립하신지 50년이 되었고, 제가 이 회사에 입사 한지는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실 제가 대학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 IMF가 터져서 신규채용이 거의 없었거든요. 회사를 다니던 사람도 나오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대학 졸업 후 그냥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 1년 이상 지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저는 가업을 잇기 보다는 나 나름대로 다른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캐나다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원하던 곳으로의 취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부친인 강길박 회장도 아들을 금성다이아몬드에서 일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입으로 와서 일 하라고 안했어요. 내가 와서 일해라 그러면 사회생활을 너무 쉽게 생각할 것 같아서였죠. 나도 아들이 다른 사회경험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죠. 그래서 내가 직접 부르지 않았지요. 좀 더 어려운 사회를 알아야 하니까요. 내 아들이지만 나름대로 공부를 잘 했고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죠.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루는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아버지네 회사에 제가 가서 일 할 데 없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본인이 그렇게 말을 하니 나는 속으로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했죠. 그럼 됐다. 너 현장에서 기름걸레 만져도 좋으냐 물으니 괜찮다 하더라고요. 사실 나도 총각 때 실업자 생활을 오랫동안 했거든요. 직업을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그 마음은 나도 잘 알죠. 부친과 함께 금성다이아몬드를 세우기 전에는 나도 제대로 직업을 못 구해 공사판에서 일하고 그랬었지요. 청계천 공사할 때 내가 자갈을 매고 운반도하고 그랬습니다.”
직장운, 관운이라는 말이 있고 인재운, 직원운이라는 말이 있다. 기업은 좋은 인재를 찾기 힘들어하고 좋은 인재는 자신의 꿈을 펼칠 기업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창업자도 자신이 평생을 노력해 만든 기업을 소중하게 여기고 또 성장시킬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 한다. 그렇기에 많은 창업가들에게 아들이 좋은 인재로 성장하면 큰 복이라 말 한다.

 

 

낙하산 편견 깨는 것은 오직 실력


금성다이아몬드의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중요한 것은 판매처를 확보하는 일이다. 현재 강재호 대표는 1년 중 6개월을 해외 출장으로 보낼 정도로 해외 판매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그의 능력으로 회사가 매해 성장을 계속하면서 지금은 회사의 리더이자 중심이 되었다. 
“가업을 승계하는데 따로 준비할 것은 없어요. 가업을 승계하는 것도 사실 해야겠다는 굳은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보기 좋게는 가업인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황금낙하산이죠. 작은 기업이던 큰 기업이던 오너의 아들이 회사를 다니는데 외부적이던 내부적이던 마찰이 발생합니다. 낙하산이라는 편견을 깨는 것은 오직 실력입니다.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청소하며 사람들에게 잘해도 매출이 안 오르고 월급이 안 오르면 좋아하지 않죠. 결국은 실력인 것이죠. 그래서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싶어요. 저의 부친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버지가 특별한 분이기에 아들은 힘들 수 있어요. 평범한 분이시면 아들이 힘들지 않을 수 있죠.” 
오너의 아들이라고 예외는 없다. 매출을 올려야 살아남는다. 강재호 대표는 전국의 거래 가능한 기업체를 발굴하며 시장에 나온 제품에 대한 조사를 하고. 경쟁 업체들을 분석했다.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해 제품에 대한 연구도 철저히 했다.   

 

2세는 잘해야 본전, 성장은 필수 


강재호 대표가 말하길 낙하산은 사람들에게 밉보이기 쉽다 한다. 그래서 그도 처음 입사 후 몇 년은 제일 먼저 출근해 사무실과 화장실 청소부터 했다. 그런 그에게 2세 경영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물어보았다.  
“2세는 잘해야 본전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먼저 입사한 분들께 안 찍히려고 나 스스로 청소부터 했어요.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처음부터 제가 시장 조사를 하고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20년 전의 저는 정말로 저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어요. IMF때 다른 회사 입사가 잘 안되어 금성다이아몬드에 입사를 했고 그래서 정말 노력해야 했습니다. 금성다이아몬드는 단순히 강씨 집안 남자들이 3대에 걸쳐 경영하는 회사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왔고 어머니, 할머니, 여동생 등 온 가족이 함께해서 이끌어 온 그런 회사입니다. 이 회사를 헛되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물론 저보다 더 멋지게 발전시키는 분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분을 찾기가 어렵고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제가 스스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
강재호 대표는 가업도 시대의 흐름을 타며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 한다. 시장 변화에 순응해서, 시장에 맞는 것을 해야 한다고. 
“세워진지 오래된 기업이기에 시장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 동안 이 일을 했다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죠. 잘 아는 시장이라고 익숙하게 생각하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일이 발생하더라고요. 우리가 거부를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은 막지 못해요. 시장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 가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숙명입니다.”  
취업이 힘든 이 시대에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앞선 전임자들의 업적을 뛰어 넘어야만 살아남는 길이다. 실력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완성이 되어야 한다. 과거와 달리 현재는 시장상황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래서 2세, 3세는 더욱 노력하고 시장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글 · 사진 _ 한상훈

 


 

<월간 TOOL 2018년 5월호> - 가업승계 지원제도

 


 

<월간 TOOL 2018년 5월호> - 가업, 어떤 기업이 성공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