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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만들어진 배 ‘네메시스호’ 아편전쟁 승리를 이끌다

 

중국보다 뒤쳐졌던 유럽의 제철 기술. 그러나 ‘혁명적’이라 불리는 코크스 고로 방식의 제철을 통해 
18세기, 영국은 해양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번 연재에서는 중세 유럽의 제철과 강의 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철의 역할과 국력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다.

 

 

 

철과 탄소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강철


고대 중국에서 이미 기원전 4세기경에 용광로를 이용하여 주철과 강의 제조법이 활발히 개발되어 무기와 농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용도가 높아진 반면, 유럽에서는 중국보다 1천년이 지난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철과 강의 생산 기술이 많이 뒤쳐져있었다.

 

우츠 강철로 만들어진 검


BC 400년경, 중국으로부터 기술을 얻은 인도인들은 철과 탄소를 완벽한 비율로 결합시켜 강철을 만드는 제련 방법을 발명했다. 인도인들은 작은 단철 덩어리와 숯 조각을 도가니에 넣은 다음 입구를 밀봉하고 용광로에 넣어 풀무질을 통해 온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만든 ‘우츠 강철(wootz steel)’을 전 세계에 팔았다. 인도의 강철은 돌고 돌아 스페인의 톨레도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후 스페인의 카탈로니아에서 인도와 비슷한 환원로(화로의 한 종류)가 개발되며 여기서 생산된 단철로 말굽, 마차바퀴, 경첩 및 철제 갑옷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혁명적’이라 불리는 코크스 고로 제철


유럽의 고대와 중세의 제철기술로는 철광석을 충분히 녹일 만한 높은 온도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14세기 초 라인강 유역의 지겔란트 지방에서 연료를 목탄으로 하는 용광로(고로)가 발명되어 철을 용융상태로, 또한 매우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철광석은 풍부히 매장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연료로써의 목탄이 절대 부족하였으며, 18세기 초기 영국의 제철업은 삼림의 급격한 벌채로 말미암아 유일한 야금용 연료인 목탄에서 석탄으로의 전환이 절대로 필요하였다. 목탄 대신에 석탄을 연료로 하여 철을 제조하는 방법은 16세기부터 비롯되었고(중국에서는 11세기부터 석탄을 사용) 에이브러햄 더비 1세가 코크스를 연료로 하여 고로로 선철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또 그의 아들 더비 2세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1735년 본격적인 코크스 고로 제철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제국주의를 불러온 제철 기술


고로방식의 출현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은 주로 대포와 화약과 포탄을 통해서였다. 고로방식에 의해 주철로 주조된 대포와 포탄이라는 신병기로 서유럽은 무장했던 것이다. 당초 서독에서 시작된 고로방식은 영국에 정착하여 꽃을 피운다. 16세기경 영국은 이 주철포로 독일을 장악하고, 스페인함대를 격파하여 해양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렇듯 철의 제조에 코크스를 이용한 혁명적인 사건 덕택에 영국은 축적된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원재료 확보와 잉여생산물의 판매 확대를 위해 해외 식민지 개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당시 중국은 전통적인 농경사회로 거대한 국토에서 다양한 생산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였으며, 특히 도자기와 차는 유럽의 귀족들의 사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크스 고로의 모습

 

아편전쟁

 

영·중 무역불균형으로 일어난 아편전쟁


영국은 자체 생산한 모직물과 인도와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면직물(캘리코), 시계와 기계류 같은 고가의 제품을 중국에 팔고자 하였으나, 중국은 면직물은 자체 생산도 많았고 모직물은 북방 오랑캐들이 입는 옷이라는 편견으로 수입량은 극히 일부분이었으며 시계와 기계 등은 수요가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 중국에 차와 비단 도자기의 값으로 지불한 금액은 약 4200백만 냥(은 2,100톤)에 달하였고 이는 심각한 무역불균형을 야기하였으며,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銀)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된 양귀비를 원료로 만들어진 아편을 중국에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하였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아편에 중독된 사람들이 넘쳐나자 이에 청나라는 임칙서를 내세워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고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난징조약시의 모습

 

무쇠로 만들어진 ‘악마의 배’ 네메시스호


영국은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하며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국의 무기는 바로 전함 ‘네메시스호’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쇠로 배를 짓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길이 56m, 폭 8.8m, 적하중량 660톤의 네메시스호는 60마력짜리 포레스트 증기엔진 두 대를 장착했다. 배는 두 개의 돛대도 가지고 있어 풍력과 증기에너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배에는 32파운드의 선회포가 장착되었다. 이 대포는 멀리 요새의 성벽에 구멍을 낼 수 있을 화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6파운드 포 5문, 캐논포 10문, 로켓 발사대 하나를 장착하고 있었다. 제1차 아편전쟁은 1839년 10월말에 발발했다. 네메시스가 광둥(廣東)성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40년 11월 25일로, 이미 동인도회사군과 중국군 사이에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승기를 불러온 네메시스호의 활약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고 있던 앞서의 전투였지만 네메시스가 주강(珠江) 삼각주 전투에 투입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이 괴물 배는 1841년 1월 7일 후먼(虎門) 포대를 공격했다. 청나라는 양 연안에 11개 포대와 300여개 대포를 설치하고 3개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청군은 네메시스호가 도착하기 이전에 영국 군함이 시도하는 함포 사격도 버텨냈다. 이번에도 중국인들은 적을 막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메시스는 증기엔진으로 가동했기 때문에 범선 군함을 예인했고, 군함들이 네메시스에 이끌려 함포사격을 가했다. 중국 정크선은 네메시스가 쏘는 포에 맥없이 쓰러졌다. 복수의 여신 그 자체였다.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모두 파괴해버렸다. 중국인들은 공포에 질렸다. ‘악마의 배’가 왔다고 베이징 조정에 보고할 정도였다.

 

한 국가의 국력을 좌우하는 철 제련 기술


청나라는 양쯔강에 16척의 전쟁용 정크선, 70척의 상선과 어선을 징발해 대비하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도 네메시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중국 전함과 양쯔강 양측의 성들의 포사격이 조용해졌다. 네메시스와 그 호위함들이 쏘아대는 포격은 청 조정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끔 했다. 1842년 8월 29일, 난징(南京) 인근 양쯔강에 정박 중인 영국 해군의 콘월리스호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조약이 맺어졌다. 이름하여 난징조약이다. 역사적으로 이 조약이 갖는 의미는 동양의 패권이 서양의 패권에게 처음으로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패한 중국도 더 이상 중화사상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거대 중국은 유럽에게 분할되고 청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철은 인간의 문명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된 재료이지만 이로 인해 발생한 자본과 권력에 의해 많은 희생이 발생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철을 다루는 기술을 가진 나라가 강대국인 것이다.

 

 _ 크레텍 윤인준 수석연구원 / 정리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