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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상탐방

전남 영암 한일상사

 

선박유지 운영 조선업 전문 공구상

 

전남 영암 (유)한일상사 이봉준 대표

 

 

 

 

전라남도 영암군에 위치한 대불국가산업단지는 전남 및 목포의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불국가산업단지는 2007년 조선산업단지 혁신클러스터로 지정되었으며 (유)한일상사는 이곳에서 조선산업, 외항선박, 기업체 및 관공서와 관련하여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봉준 대표의 마도로스 시절 사진

 

외항선박 엔지니어 출신 공구인


(유)한일상사는 1988년 목포에서 한일상사로 창립하여 운영되다 2008년 대불국가산업단지로 이전. 2011년부터 (유)한일상사로 법인 전환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1988년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군납업체로서 다양한 기관부속 및 공구류를 군에 납품해왔다. 또한 목포지역 조선 산업 및 선박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공구류를 납품하며 매년 꾸준히 성장한 업체다.

 

신용제일한일상사 표구는 1988년부터 한일상사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다.


“저희 한일상사는 해군과 같은 군부대, 목포해양대학교, 해양경찰의 경비함, 외항선박 및 관공서에 납품을 합니다. 또한 조선 관련 업체 해운 관련 업체 등에 선박용품 및 공구류를 납품하죠. 개인 소매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매출의 대부분이 조선 산업과 해운업 등 선박에 관련된 것이죠. 사실 그러한 이유가 저는 1974년부터 오랫동안 외항선박의 엔지니어로 승선해 선박의 기관 및 기기를 유지 보수했습니다. 수리에 필요한 다양한 공구들을 사용해서 많은 종류의 공구를 알고 있죠. 선박기관사로 승선할 때 돈 번다고 법정 휴가도 포기하고 23개월을 같은 선박에 근무했던 적도 있었어요. 당시 한국 선원들은 배가 고장이 나더라도 기관 부속과 자재 그리고 공구류만 있으면 육상 수리를 의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체 수리해 선박이 안전하게 운항하도록 만들었죠.”

 

 

마도로스 생활로 가족과 형제 지원


이봉준 대표는 지금의 ‘목포해양대학교’ 전신인 ‘목포해양고등전문학교’ 기관과를 1974년 졸업해 선박기관사로 일했었다. 3급 기관사 면허로 시작해 최고등급 1급 기관사가 되었으며 선박의 기관장, 일본회사의 동경 주재원으로 공무감독도 했다. 그는 목포에서 한일상사를 운영하면서 광주대학교와 목포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여 경영학석사학위도 갖고 있다.


“1970년대 초반 목포해양고등전문학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선망하고 지원하는 학교였어요.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교복 등 각종 피복을 지급받았고, 군사훈련을 통해 군복무도 면제 받아 바로 선박에 취업할 수 있어서 참으로 고마운 학교였습니다. 당시 승선을 하면 급여가 육상의 일반 샐러리맨 3배 혹은 4배여서 인기가 많았죠. 저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승선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께 기와집을 지어드렸고 동생들의 대학 학비 모두를 책임졌지요. 1986년부터 2년간 일본 동경에 있는 일본선박회사에서 공무감독으로 근무하며 일본에 기항하는 선박의 운항 관리 업무를 했습니다. 따라서 영어와 일본어도 어느 정도 하게 되었죠.”

 

목포에서 공구상으로 제2의 인생 시작


1급 기관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는 그는 각종 공구와 사용법에 있어서 남다른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선상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고달픈 생활이다. 선박에 승선하면서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모험 같은 생활을 접고 선박회사의 육상관리직으로 근무를 한다. 그러던 중 고향 목포에서 관공서와 학교 그리고 군납 등을 하는 공구상이 매물로 나왔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과감하게 선박회사에 사표를 내고 공구상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한일상사 실내 높은 곳에는 표구와 그림 여러점이 걸려 있어 방문객의 흥미를 얻고 있다.


“공구인의 생활은 1988년 6월 1일부터 시작되었네요. 지금은 군대에 납품을 하려면 등록하고 경쟁 입찰에 참가해야 하지만 당시에는 면허제였습니다. 군부대로부터 해당물품을 적합하고 신속하게 납품이 가능한지 깐깐한 심사를 받아야 했죠. 당시 제가 보유중인 1급기관사면허와 승선 경력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군납과 관공서 납품 그리고 일반 판매를 하면서 공구유통업이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죠. 첫째가 공구명칭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판매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하나의 공구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어려움이 많았기에 공구표준 명칭을 통일화해서 핸드북이라도 만들어 배포하고 싶었습니다. 둘째로 판매대금의 수금이 힘들었어요. 군납이나 관공서등의 수금은 2주 이내 입금이 되지만 일반 기업체는 장기어음을 주고 가끔 부도까지 일어나는 어려움이 많았지요.”

 

한국공구보감 대중소분류 개선작업 권유


IMF이전 한국 사회는 어음을 많이 사용했다. 처음 공구상을 시작했을 때 이봉준 대표가 선배들로부터 들은 충고도 물건을 다 주고 수금 못하면 헛것이라는 말. 수금이 어려운 곳은 심한 경우 추석과 설 명절 2번만 수금을 받을 수 있었다. 공구상을 인수해서 운영하는 입장이라 처음부터 어음 거래를 고집하는 거래처와 계속 거래를 해야 했다고.

 

선박 수리 및 제작에 사용하는 총포(타정총) 판매도 하는 것도 특징이다.


“수금이 어려운 곳은 거래를 서서히 줄여나가고 군부대나 관공서처럼 수금이 확실한 거래처 위주로 매출을 올렸죠. 그러다 90년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크레텍에서 카탈로그를 만들어 배포하는데 제가 볼 때 대, 중, 소 분류가 부족하고 또 분류에 따른 코드 번호의 일관성이 부족하더군요. 한 번 부여된 코드 번호는 달라지면 안되거든요. 제가 가지고 사용하는 책 중에 전세계 선원들이 사용하는 ISSA카탈로그가 있습니다. 그 카탈로그도 매년 발행되지만 코드번호는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오래된 카탈로그의 제품 코드번호도 단종이 아니라면 사용이 가능하죠. 그것을 복사해 크레텍에 보내어 분류방식을 참고하길 권했어요. 신기하게도 그 이후 한국공구보감도 ISSA카탈로그만큼 발전된 체계를 갖추더군요.”

 

한국공구보감과 ISSA카탈로그로 주문 편리


ISSA카탈로그는 ‘세계선용품협회’에서 발행하는 카탈로그다. 선용품은 선박운항과 선원들에게 필요한 항해장비, 각종공구, 생활용품 및 의약품, 식품 등을 말한다. 전세계 40개국이 세계선용품협회의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해외 어느 항구에서라도 선박이 보급을 받을 때 국적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ISSA카탈로그의 6자리 코드번호를 통해 주문과 보급이 가능하다. 조선 산업 및 운항선박의 유지보수에 필요한 공구를 많이 취급하는 (유)한일상사는 현재 ISSA카탈로그와 더불어 한국공구보감 카탈로그를 통해 거래처와 주문을 오차 없이 주고받고 있다.

 

한일상사는 공구관련 다양한 카탈로그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남지역 여러 업체와 거래하고 있다.


“저는 한국공구보감이 한국의 산업 현장과 공구 유통업에서 큰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공구 종류를 분류하고 체계화를 잘해서 저도 거래처도 보다 쉽고 편리하게 주문이 가능하게 되었죠. 제가 처음 공구유통업을 했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온라인 송금제도가 없어서 현금다발을 몸에다 둘러서 묶고 목포에서 야간기차를 타고 서울 청계천에서 물건을 직접 보고 구입해야 했어요. IMF이후 어음도 차차 사라지고 어느 순간부터 온라인 주문이 가능해지고 사무실 업무도 전산화되면서 사업체도 점점 커지더군요.”

 

지역사회, 직원들과 상생하는 삶 가져


1953년생의 그는 현재 목포, 영암지역 공구인의 대선배이자 사업가로 지역민의 인정을 받고 있다. 마도로스의 삶, 공구인의 삶 모두 보람 있고 후회 없었다는 그는 이제 지역민, 직원들과 상생하며 살고 싶다 말한다. 가난한 집안의 5남매 장남으로 태어나 동생들을 키우고 후원하고 3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열심히 살아온 그는 마지막 인생 후반을 멋지게 보내고 있다.

 


“후회 없이 좋은 삶을 살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35년 된 노후선박에 승선하자마자 기관실의 화재사고로 큰 화상을 입고 3개월 넘게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고, IMF 때 부도 위기까지 몰렸으나 주위의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잘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의 작은 희생을 통해 온 가족이 행복했으니 그걸로 된 것이지요. 우리 세대의 모든 집안의 장남, 아버지의 삶이 그래왔으니까요. 저는 직원들이 즐겁게 근무하고 행복하길 희망합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저마다 근속년수 33년, 25년, 10년이 넘는데 직원들의 노고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업체를 운영해오면서 직원들의 노고에 보답하려고 최대한 배려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장기근속자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이 저희 회사의 자랑이죠. 같은 지역에 후배 공구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가 잘되길 바라고, 후배들이 거래하고 있는 업체로부터 견적의뢰가 들어오면 그 업체와 지속적인 거래를 부탁하면서 정중히 견적 제출을 사양하고 있어요. 같은 지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공구인들 모두가 상생하면서 행복하고 부자되시길 소망합니다.”

 

글·사진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