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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상탐방

'공구상에서 대학생으로' 계양테크툴 임혜정 사모

 

공구상에서 대학생으로

늦깎이 공부의 재미

 

경남 진주 계양테크툴 임혜정 사모

 

 

 

 

배움엔 나이가 없다. 60세에 공구업을 떠나 경상국립대학교 환경산림과학부 학생으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계양테크툴 임혜정 사모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임혜정 씨는 대학생이 된 후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하고 있다.
 

30년 가까운 공구인생에 갑자기 찾아온 협심증


‘라스트 홀리데이(2006, 미국)’라는 영화가 있다. 주방용품 판매원으로 평생 일만하던 주인공 조지아 버드는 근무 중 머리를 부딪혀 병원에 실려 가고, 갑작스럽게 남은 인생이 3주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절망도 잠시, 조지아는 평생 꿈만 꾸던 일들을 하기로 결심한다. 퇴직금과 모아둔 돈을 털어 유럽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최고급 호텔, 1등석 비행기, 화려한 옷과 유명셰프의 음식까지. 평소에 경험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해보고, 남은 시간동안 후회 없이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며 주변을 변화시킨다. 당신이라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는가?


“5년 전이었어요. 가게 운영하며 리모델링까지 하는 과정에서 과로가 왔어요. 갑자기 가슴이 조여 오면서 숨이 안 쉬어지는 거예요.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죠.”


평생 열심히 공구상을 일궜던 계양테크툴 임혜정 사모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건강에 대해선 걱정해본 적 없던 그였다. 갑작스럽게 쓰러져 실려 간 병원에서 겨우 고비를 넘겼고, 의사로부터 심장으로 가는 혈류가 차단되는 증상인 ‘변이형 협심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1년간 치료와 회복만을 위해 힘든 시간을 버텨야 했다.

 

늘 응원해주는 가족들과 함께 (아래 계양테크툴 강명중·임혜정 대표 부부 / 위 계양공구 강호영(아들)·전봉수(며느리) 대표 부부)

 

인생 되돌아보니 ‘공부 못한 게 참 아쉽다’


경남 거창 산골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임 씨는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어릴 적부터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다. 동네에서 공부를 곧잘 하는 아이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배움은 사치였다. 그는 가난은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른 나이에 돈을 벌었고, 1992년부터 남편인 강명중 대표와 30년 가까이 공구상에서 함께 일했다. 오랜 세월 가족을 위한 삶과 공구인으로서의 삶이 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임 씨가 힘들 때마다 읊는 시 두 편. 박노해 시인의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와 신달자 시인의 ‘나는 내 나이를 사랑한다’.


“‘내가 공부를 못했던 게 참 아쉽다.’ 생의 마지막이라고 느꼈던 순간에 떠올랐던 단 한 가지 생각이었어요. 외적으로는 채울 수 없는 배움에 대한 허기짐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61년생 베이비부머 세대거든요. 출퇴근시간 개념도 없고 주어지는 대로 일만 열심히 하던 시대를 살았어요. 러닝머신 위에 올라탄 듯 멈추지 못하고 달릴 줄만 알았지, 내 꿈이 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없었어요. 그렇게 혼자 있던 긴 시간동안 결국 나를 돌아보고 이런 결심을 하게 됐어요. 첫 번째 인생은 일단락 내리고 내가 원하는 두 번째 인생을 살겠다고요.”

 

매장을 넓힐 때마다 설치한 디자인이 다른 타일들. 계양테크툴의 세월이 담겨있다.

 

산림치유 관심, 간절한 포부로 환경산림과학부 합격


처음엔 손 놓은 가게 일이 걱정돼서 잠이 안 왔다. 하지만 새로운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대학 공부를 위해 굳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경상국립대학교 환경산림과학부에 지원했다. 힘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종종 찾아갔던 숲에서 기운을 얻었고, 그와 같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산림치유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20살 학생들과 4년간 공부해야하는 일반대학이었다. 입학 면접에서 면접관은 “왜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로 왔나. 중도에 포기한다면, 당신으로 인해 뽑히지 못한 한 젊은이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자신 있느냐”고 물었다. 임 씨는 “합격만 시켜주신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열심히 하겠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포기하지 않겠다”고 간절한 포부를 밝혔다.
합격 통보가 왔다. 20학번 신입생이 되는 순간,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입학 후 처음 배우는 자연대 수업을 듣게 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니까 원소 기호부터 외워야하는 거예요. 수업도 너무 많고 그 수업마다 팀플과 과제도 많았어요. 코로나가 심하던 때여서 줌으로 강의를 했는데, 어떻게 강의에 연결하고 시험쳐야하는지 물어볼 데도 없었어요. 이쪽에서 수업하려고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수업하는 경우도 있었고, 인터넷으로 시험 치다가 다음을 눌러야하는데 마침 버튼을 눌러서 시험지가 날아간 적도 있어요.”

 

대학 수강 모습. 함께 과제하며 친해진 동기생들은 그의 멘토가 되어 많은 관심과 도움을 줬다.

 

배워도 잊어버려 반복 또 반복… 가족 응원이 힘


나이 들어 하는 배움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포기는 없었다. 거북이처럼 멈추지 않는 꾸준함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들이 5시간 공부하면 나는 10시간 하자’는 생각으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을 폈다. 기침 한번 하면 다 날아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금방 잊어버렸지만 반복, 또 반복했다. 하지만 병으로 체력과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공부에 전념하다보니 머리 부위에 대상포진이 오기도 했다.


“얼굴이 새까맣게 변하고 심각한 상태여서 교수님이 그만두라고 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제일 하고 싶었던 게 공부니까 하다가 죽어도 괜찮다고 했어요. 공부가 목숨 걸고 할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가족들은 이제 그만하고 쉬라고 하지 않고 참아줬어요. 그 한마디 했으면 저는 포기했을 지도 몰라요. 너무 고마워요.”


그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가족들의 응원 덕분이었다. 사랑꾼 남편 강명중 대표는 아내의 공강 시간에 도시락을 싸들고 와주고, 공부할 수 있도록 차 안에 책상까지 마련해줬다. 든든한 첫째 아들 계양공구 강호영 대표와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 그리고 두 며느리도 늘 임 씨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공부의 노력은 결과로 나타났다.
“처음엔 꼴찌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보니까 의외로 33명 중에 20등을 했더라고요. 학기마다 등수가 올라가서 2학년 2학기에는 6등을 했어요. 성적장학금도 받았어요.”

 

임혜정 학생은 2학년 재학 중 꿈을 이루게 해준 대학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발전기금을 전달했다.

 

병든 나무 치료하는 ‘나무의사’가 꿈


환경산림과학부를 나온 많은 학생들은 나무의 생리, 임업 경영, 산림 보호, 토목, 공학 등을 다루는 ‘산림기사’ 국가자격증을 취득하고 각자 원하는 분야로 나아가게 된다. 임혜정 학생은 아픈 사람들을 위한 산림치유에 관심이 있어 학부에 들어왔지만, 얼마 전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나무를 치료하는 ‘나무의사’가 되는 것이다.


“나무병원에서 일하는 나무의사라는 직업을 최근에 알게 됐어요. 사람은 아프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무는 아파도 말할 수가 없잖아요. 나무들이 못 사는 곳에 심기고 병에 걸려 안타깝게 죽어가는 걸 볼 때 사람에 비해 나무는 치유할 기회가 참 없구나 싶어 꿈을 바꾸게 됐어요. 앞으로는 아파트 화단의 나무 같은 것도 그냥 잘라내기 어렵고 의사들이 처방해야하는 시대가 올 것 같아요. 나무의사는 합격률이 5% 밖에 안 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꼭 합격할 거예요.”

 

100세 시대,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세요!


그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도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라는 응원의 말을 남겼다.


“도전이라는 건 언제든 실패할 수 있는 확률이 있기 때문에 도전이라고 하는 거지, 무조건 성공해야한다면 도전이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공부에 도전을 했어요. 20살에 해야 하는 일을 60살에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너무 재밌고 행복해요. 100세 시대라면 앞으로 40년은 더 쓸 수 있어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며 도전하다보면 내 길을 찾게 되고, 자신감도 생겨요. 중요한 건 느려도 꾸준함이에요. 여러분의 인생 2막도 내가 뭔가 보람을 느끼고 잘할 수 있는 일, 행복한 일을 찾아서 도전하기를 바라요.”

 

글·사진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