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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가수 김용임

 

트로트 가수 김용임

 

 

 

‘내 인생 고달프다 울어본다고 누가 내 맘 알리요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 웃으면서 살아가보자’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트로트 ‘부초같은 인생’의 가사다. 이 노래처럼 가수의 길을 웃으면서 걸어온 트로트 대모 김용임씨. 이미자, 김연자, 주현미와 함께 정통 트로트의 계보를 잇고 있다. 최근 ‘미스트롯2’ 심사위원으로 더욱 알려진 그를 만났다. 그는 어떻게 트롯트의 대모가 됐을까. 

 

 

 

조카가 공구상 해요


'의사 선생님', '사랑의 밧줄', '내사랑 그대여', '부초같은 인생', '사랑님', ‘오늘이 젊은날’… 가수 김용임의 히트곡이다. ‘나는 트로트가수다’를 우승한 이후 최근엔 각종 예능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보인다. 트로트 전성시대, 트로트 대모 김용임은 알고보면 공구업과 인연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공구상 대양종합상사 김연민 대표가 제 친조카입니다. 이렇게 공구상 사장님들과도 인연이 있네요.(웃음) 저희 조카는 원래 운동을 했는데, 처음 공구상을 하겠다 할 때 세상 물정을 모를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공구업이 참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조카의 사업을 나름 돕기도 했지요. 제 눈에는 조카가 마냥 여리다고 생각했는데 공구업을 하면서 사업가이자 듬직한 남자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조카가 공구인이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코로나로 힘든 세상이지만 백신이 나오고 있으니 언젠가 다시 일상생활을 찾을 겁니다. 공구인 여러분도 그때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전진하시길 응원합니다.”   
가수 김용임씨가 공구상 하는 조카를 남달리 생각하고 응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언니들의 사랑과 응원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과거 자신이 가족들로부터 받은 응원과 사랑을 생각하면서 조카의 공구상 운영을 지원했다. 

 

 

2020년은 가수 김용임의 해였다. MBC'나는 트로트 다수다' 1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MBN'동치미', '사랑의 콜센터', '내일은 미스트롯2' 등 다양한 프로에 출연해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다. 수많은 프로에 출연이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어서다.

 

 

음악공부 많이 한 노래 신동

 
2020년은 가수 김용임이 대중에게 더더욱 널리 알려진 해다. MBC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출연해 1위를 차지했고, 종편채널 MBN의 ‘동치미’에 고정 출연하며 토크쇼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이후 TV조선 ‘사랑의 콜센터’, ‘내일은 미스트롯2’ 심사위원, MBC ‘복면가왕’까지 출연했으니 그녀의 전성시대는 바로 지금이다. 다음은 그와 만나 나눈 인터뷰 전문.


-트로트 열풍인데, 심사위원까지 할 만큼 실력 있는 가수로 불리는 비결이 있나요?
“자랑인지 겸손인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재능을 무시 못 하죠. 시골에서 저희 아버지가 노래를 좋아하시고 흥도 많으셨던 분이셨어요. 큰아들이 아니었다면 본인이 극단생활을 하고 싶었다고 하셨을 정도로요. 저는 스스로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기억은 없어요. 제가 1965년생인데 어릴 때는 TV도 흔하지 않았거든요. 당시에는 만화방에서 10원 주고 문턱 멀리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텔레비전을 보고 와서는 집에서 노래를 막 불렀대요. 음정 박자 가사 딱딱 맞춰서 잘하니까 아버지가 노래공부를 시켜야겠다 생각하셨구요. 아버지는 노래도 잘 하시고 서예도 잘 하시던 분이었어요. 호탕하시기도 하고 변덕스러움도 있으시고. 분명 예술가적인 부분이 있으셨죠. 자신의 꿈을 제가 대신 이루시길 원하셨는지 주변에 물어 물어 노래 선생님을 찾아주더라고요.”


-당시에 노래를 배울 데가 많았나요?
 “그때는 지금처럼 실용음악학원도 잘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열렬한 응원 덕분에 성악과 민요를 익히고 피아노, 기타, 가야금, 무용도 배울 수 있었죠. 지금과 달리 1960년대 70년대는 민요쪽 가수가 인기가 많았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10대 시절에는 민요와 성악을 함께 익혔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극장쇼 무대에도 서 볼 수 있었어요. 어떤 노래도 다 소화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고 할까요. 20살이 되면서 서울예술대학 무용학과에 입학했죠.”  

 

 

갈색추억 한혜진이 동창… 기다리면 잘 될 거야!

 
-대학시절에 첫 음반을 냈는데 바로 유명세가 찾아오던가요?
“20대 때는 가수로서의 행운이 바로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엄하셔서 언제나 집과 학교 밖에 없었죠. 그러다 학교 다니면서 어렵게 음반을 내어 방송, 라디오에도 출연했는데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어요. 연예인은 매니지먼트가 참 중요해요. 재능과 함께 좋은 교육을 받아 노래 실력을 갖추는 것과 가수로 성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대중에게 알려지고 성공하는 것은 운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본 바탕에는 실력이 있어야 하죠. 한순간에 뜨다가도 실력 부족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연예인들이 많습니다. 실력이 있어도 운이 없으면 알려지지 않고요. 20대 시절, 남산에 있는 서울예대에서 여러 학과 사람들과 교류를 가졌던 기억이 나요. 학교 앞마당에서 각지의 재능을 선보이며 어울렸죠. 그때 ‘갈색추억’으로 유명한 한혜진이 동창생이었고요. 내 노래 실력을 알던 혜진이가 내게 기다리면 잘 될 거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참 고마운 친구죠.” 


-운이 있어야 소위 뜨는, ‘때’가 찾아오는 군요?
“당시에 안 되는 때였는지 뭐든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가 편찮으시기 시작하셨고 집안도 점차 기울어 졌고요. 부모님과 오빠 언니들의 그늘 속에서 즐겁게 노래를 배우던 제가 나 홀로 연예계 바닥을 헤엄치는 것은 힘들었어요. 마음고생을 많이 했죠. 쉽사리 내 노래가 방송 되고 가수 되고 스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때가 아니더군요. 트로트 경연대회의 성공도 운이 70프로라 생각해요. 미스트롯2 최종 우승자인 양지은씨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죠. 본선 3차전 메들리 팀 미션에서 떨어졌지만 갑작스러운 공석 발생으로 양지은씨는 가까스로 준결승전에 합류 했어요. 그리고 끝내 최종 우승까지 차지했죠. 기세라는 것 무시 못해요. 가족의 열정적인 응원과 후원을 받는 것도 크게 보면 운이고 때를 잘 만나야 빨리 유명가수로 알려지죠.”
 

 

피나는 연습과 기다림 끝에 찾아온 기회는 트로트메들리앨범이었다. 이후 '사랑의 밧줄'로 가수 인생이 바뀌었다.

 

 

연예계 화려함 속 빈곤 많아… 기회 잡는 것이 실력

 
가수로서 큰 빛을 보지 못했던 그는 1992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노래를 쉬게 된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포자기 심정이었다고. 평생 노래 하나를 보며 가수의 꿈을 싣고 살았는데 생각대로 안 풀려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차라리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쳤으면 사무원이나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를 가까이 본 그는 그럴 수도 없었다. 


-연예계를 잠시 떠나셨는데 어떻게 다시 음반을 내셨나요?
“그렇게 가수가 되고자 할 때는 안 되더니 이혼 후 노래강사로 일하다가 기회가 왔어요. 메들리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연예계의 화려함 속에는 빈곤이 너무 많아요. 가수 안하면 노래 할 곳이 없고, 돈 벌 데가 없으니 무명가수들에게는 저마다 한이 생겨요. 또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만 빛을 보는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도 살다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기잖아요. 가수도 저마다 타고난 팔자가 있습니다. 운이 늦게 오기도 하고 빨리 오기도 하고. 큰 인기를 끌어도 성공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분명한 것은 조급해 하지 말고 내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때를 기다렸다 때가 올 때 떨지 않고 무기를 잘 쏘아야 하는 거죠.” 


-그렇게 찾아온 기회로 만든 것이 트로트 메들리인가요?
“처음에는 큰 기대 하지 않고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용으로 만든 트로트메들리였어요. 수십 곡의 다양한 노래를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도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해요. 히트 가수 노래 연습으로 매일 밤을 지새웠죠, 그렇게 만들어진 음반이 소위 말해 대박을 쳤어요. 100장 200장 주문이 들어오더니 최종 100만장이나 팔렸으니까요. 큰 돈 벌게 된 음반 사장님이 뭘 해줄까 물어보았을 때 저는 돈이 아닌 음반 만들어 달라 요구했어요. 그것이 제게는 마지막 도전이었죠.” 

 

 

앨범도 장사처럼 영업 필요해

 
-돈을 바랄 수도 있었는데 왜 음반을 만들어 달라 하셨나요?
“내 곡을 만들어 무대에 서고 방송에 서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음반하나 해달라는 말은 꺼내기 어려운 부탁이었어요. 곡 하나를 제대로 만드는 것에는 많은 돈이 들어가요. 지금은 1곡만 들어가는 싱글앨범들도 많이 나오지만 2000년 당시에는 1개 앨범에 보통 15곡이 들어가야 했죠. 15곡 하나 하나 작곡가들로부터 사와야 하고 이후 편곡비, 후녹음작업, 믹싱작업을 해야 해요. 다 비용이죠. 이외에도 사진촬영, 음반자켓작업, 수정작업에 앨범 주문 생산까지 앨범 하나 나오는데 많은 비용이 발생해요.”


-힘들게 제작한 음반 어떻게 인기를 모았나요?
“음반을 만들어도 끝이 아니에요. 홍보가 중요해요. 1년 동안 새롭게 나오는 가수들이 얼마나 많나요. 그 사람들도 전부 자기만의 앨범, 노래를 가지고 있어요. 내 노래가 라디오에 한 번이라도 나오려면 어떻게든 홍보를 해야 해요. 처음에는 매니저 없이 혼자서 홍보하러 다녔어요. PD선생님들이 계신 MBC, KBS, SBS, 지역방송국 모두 영업을 했죠. 마치 공구상 사장님처럼 내 물건 좋으니까 한번 써보시라고. 가수도 ‘나’라는 상품을 팔아야 해요. 혼자서 열심히 홍보하고 계속 인사하고 미소가진 얼굴로 다가서야 합니다.”  

 

 

가수생활은 공구상 운영과 같아 

 
가요계에서는 노래 한곡을 히트 시킨 후 후속곡을 내지 못해 사라지는 가수들도 많다. 그러나 그녀는 ‘의사선생님’이라는 곡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고 ‘사랑의 밧줄’을 히트시키며 오랜 무명의 서러움을 극복한다. 이후 ‘부초같은 인생’, ‘사랑님’, ‘내장산’, ‘빙빙빙’ 등 다수의 곡을 히트 시키며 트로트 대모로 우뚝 선다.


-‘사랑을 밧줄’ 히트시킨 이후 고생이 끝나던가요?
“어느 정도 알려져도 눈물 나는 일 많아요. 사랑의 밧줄이 히트를 치고 여기저기서 저를 불러줬어요. 그런데 다른 가수가 제가 한 곡 부르는 것의 10배를 행사료로 받는 겁니다. 괴리감이 찾아오죠. 하지만 그럴 때 생각을 좋게 해야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처럼 가치를 올리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해요. 지금 남편이 당시 매니저 일을 했거든요. 나 스스로 그런 괴리감에 고개를 숙일 때 저보고 고개를 들고 한숨 쉬지 말라고 해요. 찾아오는 복도 사라진다고. 맞는 말입니다. 싫든 좋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더욱 긍정적으로 살아야죠. 조카에게 들으니 공구상 운영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고객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항상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해야 손님이 두 번 세 번 온다고요. 저도 똑같습니다. 공구상 운영과 같아요. 알려진다고 끝이 아니에요.”


-한 곡을 히트시키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여러 곡을 히트 시키셨나요?
“힘들다고 처져 있어선 안돼요. 좋은 느낌을 주어 선순환 시키는 것이 비결이죠. 연예인은 특히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밝게 웃어주어야 해요. 행사를 한 번 하더라도 좋은 느낌을 주어야 하고요. 그래야 다시 불러줍니다. 가수도 사람인데 힘든 순간이 있죠. 특히 무명일 때 소속사, 매니저도 없을 때는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내 노래가 알려지면서 처음에는 모른 척 하던 방송국PD님들이 저를 보고 노래 좋다고 먼저 다가와 말해주시더군요. 소속사도 생기고 매니저도 생기고요. 좋은 얼굴, 밝은 미소로 보이는 제스처 하나하나까지 정체성, 상품성을 가지고 파는 것이 가수라는 직업이에요”  

 

리듬과 박자가 내 인생의 도구… 기쁨만 주고 싶다

 
그는 지금도 전국 방방곳곳 축제와 공연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정말 바쁠 때는 하루 동안 자동차 주유를 4번이나 할 정도로 바쁘게 다니는 행사의 여왕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매일 연습을 통해 몸 상태를 체크한다. 스스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는지 매일 체크한다고. 나의 모습을 팬들에게 맞추는 것이 가수라는 직업이다.

 
-코로나로 인해 공구업계가 힘들어 합니다. 공연, 연예계는 어떠한가요? 
“나는 그나마 알려진 가수라 방송국에서도 불러주고 큰 행사에도 초대받아 가지만 덜 알려진 후배 가수들은 코로나로 생계 위협을 받고 있죠. 가수는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만 수입이 생기니까요. 저희 같은 트로트 가수들은 아예 무대가 사라진 상황이죠. 사람이 모이지 못하니 행사도 공연도 관객도 없고 너무 힘들어요. 물론 조카의 공구상 운영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구상도 쉽지 않아요. 그래도 각종 공구는 필수품이고 공사현장이나 공장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니 공구업계는 희망을 가져도 된다고 봐요. 다른 날 아닌 바로 ‘오늘이 젊은날’입니다. 제 노래처럼요. 공구상 사장님들 힘들어도 결코 고개 숙이지 마시고 내일을 위해 파이팅하세요! 사랑합니다!” 


긴 무명 생활과 굴곡 속에서도 꿈은 포기 하지 않았던 그. 그래서 더 빛나고 더 사랑받고 있다. 인터뷰 마지막에 독자들을 위한 한마디를 부탁했다. 대중가수라는 화려함을 벗고 던진 그의 말을 전한다. “공구상사 이모님으로 기억해주세요~” 당당하면서도 친절한 그를 응원한다. 

 

 

_ 한상훈·사진 _ 이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