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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일선재
대한민국 산업발전과 궤를 함께 해온 제일선재. 후발주자였지만 어느덧 창립 52년을 맞으며 가장 오래된 못 생산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2세 경영을 통해 1등 기업에서 100년 기업으로 변모중인 제일선재를 찾았다.
50년대 전쟁을 피해 실향민들이 모여든 부산에는 판자나 철사로 잡아매고 못질한 집을 지으며 내일의 희망을 꿈꿨다. 그것이 지금의 부산을 있게 한 산업의 기초가 됐다. 드럼통을 잘라 못을 만들고 철사, 철물이 산업의 기초가 되었던 시절, 그렇게 우리의 삶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세대가 좌판에서 못이나 철사 팔았던 게 시초가 아니었을까요? 동국제강, 대한제강도 못 공장으로 시작했어요. 한국철물연합회가 59년도에 생겼으니 당시 이미 못 공장, 철물점이 많았죠. 저는 69년도에 창업해 막내 축에 듭니다. 2001년도 연합회 회장을 했는데, 제일 젊은 나이였죠. 당시 업계 계셨던 분들 대부분 전업을 했고, 이제 못을 하는 업체로는 우리가 가장 오래됐을 겁니다.”
기간산업 주역으로 산업화 이끌어
못 제조만 반세기를 이어온 만큼 시장에서 제일선재의 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지현 대표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같이’의 가치를 실현해 온 인물로 업계에 정평이 나 있다.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기간산업 종사자로 자부심이 있었어요. 우리 세대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죠. 따로 할 게 없어서 못만 했어요.(웃음)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한번 잘못되면 일어설 수 없다 여겼으니까요. 빚은 더욱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제 목표가 무차입 기업이었습니다.”
현재 모든 종류의 연결 못(코일, 플라스틱, 페이퍼) 생산이 가능한 자동 포장 설비도 보유하고 있다.
(주)제일선재 부지현 대표
“이제는 양의 경영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경영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너는 이만큼 더해라가 아니라 시대흐름에 따라 변화해 가기를, 새로운 길을 개척해 100년을 향하여 한 발짝 뛰어오르는 모멘텀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제일선재 부상혁 이사
“탄탄히 뿌리내린 터전 위에 연구실과 새로운 설비를 갖추고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고 싶어요. 못이 사양산업이라고들 하시는데, 파면 팔수록 무한한 성장가능성이 있는 품목이란 확신이 있어요. 현재 내수시장이 어렵지만 수출시장과 균형을 맞춰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기업으로 잘 이어가겠습니다.”
제일선재 하면 거북이, 거북이 상표를 보면 제일선재를 먼저 떠올린다. 부 대표는 창업당시 친한 형님 두 분이 권유한 못 공장과 어망사업 중 못을 택했다. 어망사업을 했다면 보다 편하게 돈을 많이 벌었을 테지만 못 공장을 하며 고생도 참 많았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거북이는 느리더라도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아요. 거기다 등딱지는 아주 단단하죠. 저 또한 물러서면 죽는다는 각오로 해왔어요. 매월 결손 없이 운영하는 걸 원칙으로 했죠. 그래서 크질 못했어요. 그러나 그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일선재는 현재 기장 정관산업단지 내 5천 평 넘는 대지를 차지하고 있다. 영도에서 20년, 지금의 자리에서 32년차다. 1969년 창업 이후 꼬박 52년 되도록 못만 고집해왔다. 42명의 직원을 두고, 전 제품 국내생산을 원칙으로 한다.
“특출나게 1등인 업체가 있었어요. 나선형 콘크리트못을 생산해냈는데 당시 대단했죠. 이분이 동종업계 전국 연합회 회장일 때 제가 총무를 하며 많이 배웠습니다. 경쟁업체였지만 한편으론 부부동반으로 정종을 나누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지요. 그러다 90년대 쯤 원소재 자체를 꼬아 못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어요.”
별도 공정없이 철선 가공단계에서 나사골 성형을 해 특허도 냈다. 덕분에 원가절감은 물론 생산성도 높아졌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뒷주머니에 못을 넣고 다니며 쿡쿡 찔릴 때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절실했던 만큼 일등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제일선재는 지역별 정해진 거래처와만 거래한다. 시작은 어렵지만 한번 시작하면 믿고 끝까지 간다.
“우리 제품을 아무나 주진 않아요. 그러나 한번 거래처가 되면 결제를 안 해줘도 요구도 안 해요. 형편대로 받았죠. 한때 약속어음이 95%가 넘었어요. 한 달 매출의 두 세배 되는 금액까지 외상이 있었죠. 물론 어려웠어요. 은행대출은 물론 사채도 쓰고…”
‘같이 가자’는 게 부 대표의 기업철학이다. 어려움을 겪어봤고 또 도움도 받아봤기에 상대방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고.
“72년도에 고향사람이 부산에서 크게 철물점을 했어요. 2~3년 가까이 공급하고 돈은 거의 못 받았죠. 그런데 그 분이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가버렸어요. 큰 딸이 태어난 직후였는데, 공장 문을 닫고 일주일간 애를 봤죠. 그때 소재공급해주시던 분이 찾아왔어요. 더 못하게 됐다고 하니 다음날부터 무조건 재료 가져가라는 거예요. 그분 도움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요. 직원들도 마찬가지예요. 공장장이 매년 각 직원들 만나 원하는 금액을 적어오면 그대로 월급 줬어요. 한 번도 깎아본 적 없어요. 그걸로 부산대 AMP 대학원 논문도 썼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년 결산 후 순이익의 10%를 성과로 배분한다. 10년 근속 직원에게는 차도 제공한다. 사무직의 경우도 모두 주유비가 지원되며, 소사장 제도로 알아서 일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지역아동센터 후원 등 사회공헌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제일선재 해외수출 비중은 전체 매출의 65%를 차지한다. 그 중 미국이 80%를 차지하는데, 그 외 호주, 캐나다, 멕시코, 일본이 주요 대상국이다. 보호무역주의로 국가별 복잡한 관세제도를 시행중임에도 KS, JIS, ISO 등 각 나라별 인증을 갖추는 것은 물론 수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박리다매보다는 품질을 요구하는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에 대해 주문을 받고, 고객이 필요한 만큼 다품종 소량생산해서 컨테이너로 실어 보내죠. 특히 미국 관세의 경우 한국기업에 우호적인 상황이라 미국수출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90년대 말부터는 총으로 쏘는 연결못 생산시설을 국내 최초로 들여왔다. 현재 모든 종류의 연결 못(코일, 플라스틱, 페이퍼) 생산이 가능한 자동 포장 설비도 보유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제일선재 스타일 ‘신뢰’ 통해
해외시장에서도 탄탄대로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2015년 미국 안티덤핑 피소를 당해 관세만 11.8%를 내야했다.
“그때 모두가 우리는 끝났다고 했어요. 그러나 오히려 미국 고객들이 제품 가격을 6~7% 올려줬어요. 그래서 원가절감하며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죠. 국내시장도 마찬가집니다. 어려울 때 고객들이 도와주시고, 또 저희가 돕기도 하고, 제일선재만의 신뢰법이 통한 것 같아요.”
장남 부상혁 이사는 6년 전 제일선재로 합류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SK하이닉스 구매실에서 10년 근무 후 한양대 MBA를 마쳤다.
“제가 선택했어요. 아버님은 한 번도 제게 회사에 대해 얘기하신 적 없어요. 늘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IT 좋아해서 반도체 기업으로 갔고, 10년을 직장생활 하다보니 직장생활은 끝이 보이는데, 사업을 하면 내가 만들어갈 수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부지현 대표는 2세 경영 관련 세미나에 참가해보았지만 꼭 물려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내가 어렵게 꾸려왔기 때문에 본인이 내키지 않는다면 강요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언제라도 오면 ‘무차입’으로 넘겨주겠단 각오를 했죠. 꾸준하게 설비도 보수하고요. 그러나 아들이 오고 나서는 제가 나서서 뭔가 구상하고 실천하진 않았어요. 아들 스스로 새로운 미래를 찾아가도록 도울 작정입니다. 이심전심이라 생각해요.”
앞으로 100년 기업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겠다는 부 이사.
“평생 겸손하고 근면,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버님을 따라 오랜 파트너인 직원들, 거래처와 멀리 함께 가는 좋은 회사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상반기까지 생산물량이 잡혀있는 만큼 올해 매출도 낙관적이다. 국내는 콘크리트못, 해외는 특수 연결못이 주력제품이다. 전체 매출의 10~20%는 콘크리트못, 청정이 차지한다.
“지난해 전년 대비 18% 성장했습니다. 물론 내수가 좋았던 2017년도에 비해서는 매출이 좋지 않았지만, 올해 역시 작년 매출액 130억을 넘어서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위기에 강한 기업 제일선재가 과거 52년의 영광을 넘어 100년의 역사를 만들어가길 기대해본다.
글·사진 _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