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부흥식도 여자대장장이 정길순 씨
불을 만지고, 칼을 만지는 여자
 
그러나 더 뜨거운 엄마

남원 부흥식도 여자대장장이 정길순 씨



이글거리는 불꽃과 단단한 쇠, 거기에 명장의 솜씨가 더해지면 우리나라 최고의 칼 남원 식도가 탄생한다. 그 중에서도 주부들이 가장 선망하는 칼은 여자대장장이가 만든 ‘부흥식도’. 살림의 여왕 이효재가 해외 명품칼을 제치고 부엌칼 종결자로 소개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이 명품을 만드는 여자대장장이 ‘정길순’. 그녀의 삶도 ‘불’과 ‘쇠’처럼 역동적이다.



전국 유일 여자대장장이


남원 목공예단지 끄트머리에 위치한 부흥대장간. 정길순 대장장이의 쇠망치 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스물네 살 처녀가 대장장이 남편을 만나 시집오자마자 쇠를 잡았다. 단단한 체구, 몇십년간 변함 없는 짧은 커트. 남편이 쓰러지고 집안의 가장이자 대장간 주인으로 살아온 지난 40년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자대장장이’, ‘여장부’로 불리는 정길순 대장장이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취재를 위해 찾아갔을 때 정길순 씨는 잘 벼림질 된 붉은 칼면에 ‘남원’ ‘부흥’ 네 글자를 망치로 탕탕 찍어 새기는 중이었다. 소비자들에게 무한신뢰를 안겨 주는 네 글자다. 무뚝뚝하게 “사진 찍으시오”라는 말에 찰나를 놓칠까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몇 차례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 인터뷰를 위해 방으로 안내하더니 “양말이 구멍 났네. 이래도 괜찮아요?”라며 활짝 웃어 보인다. 불 앞에서 한 없이 진지했지만 보안경을 벗은 얼굴에는 소녀 같은 천진함도 보이고 시원시원한 미인의 얼굴도 보인다.
“부흥식도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참, 책임감이 무거워요.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인터뷰에 동행한 둘째 딸 곽명화 씨가 ‘어머니는 평소 성격도 여장부’라며 거든다.
“맞어. 난 성격이 좀 특이한 거 같아요. 어려서부터 남자애들이 하는 놀이를 좋아했어. 팽이도 많이 만들었고. 순창군 산골에서 자랐는데 소먹이 베러 들에 나가거나 나무하러 가서 연장도 많이 다뤘어요. 지금도 대장장이 일이 재미있고 적성에 딱 맞아요.”



산골 소녀로 자라 대장장이 아내로


정길순 씨의 고향은 전북 순창군 동계면 수장리 상외령 산골마을. 아버지가 훈장이라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늘 검소하게 살았다. 6남매 중 가운데로 태어나 아래위 형제자매가 골고루 있었던 게 큰 복이었다고. 그리고 헌신적인 어머니.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너무 좋았어요. 어떻게 엄마를 잘해드릴까 늘 생각하며 컸어요. 지금도 잘 해드리지 못한 게 안타까워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늘 정씨의 가슴을 먹먹하게 두드린다. 애당초 다른 친구들처럼 중고등학교에 못갈 형편이라 가사일을 도우며 컸다. 그리고 열일곱에 대담하게도 서울로 나갔다.
“우리 집에 노루사냥 온 서울 부잣집 아저씨가 있었는데 집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대서 따라 나섰어요. 겁도 없이. 막상 그 집에 가니까 들어갔다가 나오는 문을 못 찾을 정도로 어마어마했어요. 밥하는 사람 따로, 빨래하는 사람 따로, 아무튼 엄청 큰 집이었어요. 그러면서 시골과 서울의 생활환경이 너무나 차이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그 뒤로 미싱 자수 공장에서도 일하고 이불 공장에서도 일하고. 그러면서 마음이 강해졌어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편물일을 하던 중 어른들의 중매로 남원 대장장이 남편을 만났다. 어른들 뜻에 따라 결혼은 했지만 남원의 경제형편은 훨씬 안 좋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결혼할 때 받은 반지, 목걸이 팔아서 대장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결혼하자마자 쇳덩이를 잡은 거죠. 빠루로 못 빼고, 작두 잡아주고, 허드렛일부터.”
서울에서 치열했던 경험과 굳센 마음이 큰 힘이 됐다. 결혼 이후 하루 세 시간밖에 못 잤지만 대장간과 철물점을 같이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자 일에도 신이 났다.



남편 병환 이후 본격적인 대장장이로


그러나 신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직원이 칼을 물에 담그다가 불똥이 튀어서 17년간 운영한 철물점이 홀딱 타버렸다. 손해도 손해지만 정신적 충격이 컸다. 이후에도 작은 불이 몇 차례나 더 났다. 나쁜 일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더니. 2001년 남편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아이들 한참 학교 다니고 손길이 필요할 때였는데 남편 쓰러지고. 셔터문 내리고 몇 개월씩 병원 생활할 때. 그때 제일 많이 힘들었죠. 빚도 많았어요. 빚 전부 갚은 게 얼마 되지 않아요.”
그때부터 여섯 식구 부양하는 가장은 물론 대장간 일을 도맡아 본격적인 대장장이가 됐다. 여자 몸으로 하루 종일 쇳가루를 먹으며 칼 만드는 일이 어찌 어렵지 않겠나. 한여름에는 50도가 넘는 고온을 견뎌야 한다. 너무 고된 작업으로 오래 다니는 직원이 없어 홀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 하루하루. 쇳덩이를 두드리는 신명으로 버텼다. 그리고 ‘여자대장장이’로 다시 태어났다. 드라마 <대장금> 열풍으로 남원 식도가 유명세를 탄 데다 부흥식도는 여자가 만든다는 것이 매스컴에 알려지며 관심을 얻었다. 게다가 제품 자체가 뛰어나다보니 한복 디자이너이자 살림의 여왕인 이효재가 살림연장 최고로 꼽아 책에 소개하면서 주부들 사이에 이슈가 됐다. 그런데 종일 대장간만 지키느라 정작 정길순 본인은 처음 듣는단다.
“아이고 그래요? 정말 감사하네요. 더욱 잘 만들어야겠네.”
그러나 여자라고 무시 받는 경우도 많다. 같은 지역 같은 업종에서 선의의 경쟁자가 많다보니 시기질투도 따르기 마련이다.
“면전에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참 속상하죠. 그래도 함부로 말하는 그 사람들의 인격이 더 옹졸하다 생각하고 꾹 참아요. 한편으론 여자가 만드는 칼, 남자 못지않게 만들겠다는 다짐이 솟아요. 남원은 전통적으로 다 칼을 잘 만드는데 저만의 강점이라면 제가 남자보다 힘은 못해도 섬세함은 정말 자부해요.”


단단한 철도 레일이 명품 식도로


부흥식도 최대 강점은 재료다. 전라선이 철거되면서 모아둔 철도 레일의 중간 부분을 잘라 칼로 만든다. 기차 무게를 거뜬히 견뎠으니 그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직접 확인한 거래선에서 20년 이상 받아오기 때문에 품질은 확실하다고.
재질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열처리다. 달구어진 칼날을 찬물에 살포시 담그는데 짧은 순간에 잘 처리해야 완성도가 높아진다. 이렇게 만든 칼은 무뎌져도 살짝만 갈면 금방 날이 선다.
디자인도 다른 지역과 다르다. 칼등을 한번 접어주는 게 특징. 보통은 칼등이 매끄럽지만 남원 칼은 칼등이 접혀 있어 모양만으로 한 번에 알아 볼 수 있다. 또 양날에 자연스럽게 홈이 잡혀 재료가 붙지 않는다.
날씨에 따라 작업을 조절하는 것도 좋은 칼을 만드는 요건이다. 여름 장마철이나 비오는 날은 완제품을 만들지 않고 준제품만 만든다. 습기가 많으면 모양이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완성은 맑은 날에만 한다. 부엌칼, 생선회칼, 꼬막칼 등 크기와 용도에 따라 몇십 종이 되지만 가정용 이외의 칼은 만들지 않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식도는 현지 소매는 물론 도매를 거쳐 전국으로 판매되고 있다. 관광 코스로 대장간을 들르거나 단체 주문을 해가는 경우도 많다. 식도를 손수 구하고 싶어 땅끝 무안에서 오기도 하고, 아이를 데리고 대장간 견학을 오는 사람도 있다. 다녀간 사람들은 잘 쓰고 있다며 꿀이나 간식도 보내온다. 산나물 많이 나고 농기구 많이 쓰는 봄이나 김장철이 끼인 가을이 성수기지만 그때에 맞추기 위해 화덕 불꽃은 365일 꺼지지 않는다.


딸의 옻칠공예 더해져 명품으로 거듭나


올해 5월. 십년 넘게 병원 신세를 졌던 남편이 눈을 감았다. 아내로, 엄마로 책임을 다한 정씨에겐 만감이 교차했다.
“남편 덕분에 대장장이가 됐고 부흥식도 덕분에 자식들도 잘 키울 수 있었어요. 지금 쓰고 있는 공구들이 전부 애들 아빠가 만든 거예요. ‘남원’ ‘부흥’ 글자 새기는 망치도 그렇고. 저기 있는 공구들은 50년도 넘었지. 직접 만든 칼은 남은 게 3개밖 없어요. 이건 애들한테 물려줘야지.”
엄마의 1인 2역 덕분에 자녀들은 디자이너로 옻칠전문가로 각자 자리를 잡았다. 사위도 선뜻 대장장이 일을 배우고 돕겠다고 나섰다. 최근 그 바톤을 아들이 이어받았다. 물리치료사 팀장 자리를 버리고 대장간을 잇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직은 왕초보라 칼자루 붙이는 일부터 배우고 있다.
취재 내내 도움을 준 딸 명화씨는 <옻마루>라는 옻칠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엄마가 만든 칼을 받아와 칼자루에 옻칠과 자개로 정성들여 장식를 입힌다. 선명한 붉은 색에 오색 자개가 빛을 발하면 순식간에 예술작품으로 급이 올라간다.
“옻칠이 전통 기법인 만큼 남원 칼도 알리고 부흥식도의 가치도 높이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은 초보 단계지만 제 꿈이 엄마와 닿아 있다는 게 더욱 의미 있는 거 같아요.”


자서전으로 대장장이 인생 남기고 파


헤어스타일은 몇십 년 동안 그대로. 평소 화장은 전혀 안 한다. 단 예식장 갈 때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풀 메이크업을 한다고. 여자로서 살아오지 못한 것에 아쉬움은 없는지 궁금했다.
“너무 일찍 가장이 돼버려서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애들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죠. 여성스럽게 나를 꾸미는 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내 삶과 일에 대한 자신감.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저한테는 있거든요.”
그래도 한 번씩 외로울 때가 있단다.
“옛날엔 집 큰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집 큰 게 소용이 없네. 애들 다 나가버리고. 지금은 작은 게 좋아. 나 살만한 집은 조그마한 것도 괜찮다 싶어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자서전을 써보고 싶어요. 예전에 지어놓은 책 제목도 있는데 ‘어둠 속의 지팡이’라고. 어때요? 좀 이상한가? 내용은 하나도 못썼어.”
캄캄한 현실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꼭 자기 인생 같단다. 정씨에게 지팡이는 다름 아닌 ‘쇳덩이’다.
엄마에게 이런 꿈이 있다는 걸 딸 명화씨는 오늘 처음 알았다. 어려서부터 늘 엄하고 강하기만 했던 엄마였기에 외할머니에 대한 회한의 눈물도,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이 있는지도 전혀 몰랐던 ‘여자’ 정길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친 정길순 씨는 순식간에 ‘여자’를 벗고 또 다시 ‘대장장이’로 돌아갔다. 인터뷰 때문에 오늘 물량을 많이 못했다며 재빨리 보호경을 끼고 화덕 앞에 선다.
“쪼그마한 칼이라도 식히고 두드리고 갈고 다듬고 열 두 단계를 거쳐야 완성돼요. 그냥 되는 법이 없지. 우리 인생이랑 똑같아. 건강 잃지 않는 한 부흥식도 이름 부끄럽지 않게 잘 만들고 싶어요. 예전엔 기자들 오면 어색하기만 했는데 인터뷰 몇 번 하니까 말도 늘었어 이제. 하하하.”
호탕한 웃음처럼 대장간의 불꽃이 또 한번 활활 타오른다.

글 _ 배선희  사진 _ 최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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